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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오래되고 멋진 이야기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살아있는 것(生)이 언젠가는 멸(滅)할 것이라는 원초적 ‘불안’ 속에서 태어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의미를 찾는 거대한 불가항력적인 투쟁의 서사로 생겨났다. 인생의 두 개의 축인 살아있음과 사라져버림의 이중적 존재 가능성에 대해 인간의 끊임없는 사유가 신화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삶 속에서 죽음을 보고, 죽음 앞에서 삶을 보는 한 공간 안에서, 직면하는 그 모순을 풀려는 처절한 질문과 대답이 거기에 담겨있다. 당시대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집단적 사유인 신화적 사유는 시대를 굴절시키고, 또 시대에 의해 굴절되어왔다. 신화적 사유는 평면적이고 직선적 선상에서 헤아릴 수 있는 친절한 모순을 논하지 않는다.
확연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정연하게 놓인 고영훈의 그림은 역설적이게도 신화적 사유를 발동시킨다. 왜 나비인지, 돌인지 그리고 어째서 그곳에 놓였는지에 대한 이유를 지극히 작가적 의지로 돌려 생각하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정밀하고 정확한 빛과 색채가 살아있는 구조로 구축된 고영훈의 그림에는 상징적 오브제들과 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무궁한 공간과 시간이 있다. 그 안에 부유하는 듯하며 비현실적인 시공간에서 발생할 것만 같은 어떤 가능성과 사건(그러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그런 사건들)은 보는 이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의식과 존재의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키고 상상하게 만든다. 감각, 공간, 상징, 알레고리(allegory)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작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 의식을 엎치락뒤치락 신묘한 서사의 타래로 함께 엮이게 한다. 시간과 공간이 오묘하게 결합, 창조된 작가의 화면은 그것들을 거스르거나 혹은 넘는 차원의 통로가 된다.
<축복> 2013 종이에 아크릴릭 93×172cm
“고영훈의 전기 시대(1970-1990년대)는 패기만만하게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회화론에 반론을 제기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중략) 그는 마그리트의 생각처럼, 환영으로서 파이프이기에 파이프가 아니라면 회화가 회화라고 주장할 권리가 불가능할 것이고 그러한 한 회화는 예술로서 생명을 다한 거나 다름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고영훈은 형상을 다루는 회화란 죽음을 선포하든가, 그렇지 않다면 다른 확실한 길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중략) 고영훈이 돌을 그리면서 돌이 아닌 것으로 대체하는 일체를 비판한 건 이 때문이었으며 돌을 다루되 동어반복적으로 돌에 육박하고자 한 건 이 생각에서였다. 1970년대 ‘돌입니다’에 이어 ‘솔거시대’로 상징되는 1980년대의 ‘돌 책’과 1990년대의 ‘자연에서 자연으로’의 연작에 이르는 전기 시대가 이렇게 해서 펼쳐졌다”는 고영훈 예술의 성장과 질곡을 지켜본 김복영 교수의 평은 고영훈 작업을 가로지르는 근간이다. 1970년 그가 붓을 잡고 캔버스를 마주하던 때 주변의 모두는 미니멀과 추상에 전념해 있었다.
<스톤 북 8535> 1985 석고에 아크릴릭 142.5×98.5cm
작가 역시 사실을 관념으로 각색하는 작업을 시도했으나 그의 예술적 탐색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때 길항에서 찾아낸 작업이 바로 <코트>(1973)다. 목깃에서 소매까지 통째로 이어진 품이 넉넉한 검은색 벨벳 더블 코트를 보자 그는 이 대상이야말로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리얼리티’라고 여겼다. 같은 천으로 된 벨트까지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리며 고영훈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되 리얼리즘은 철저히 배제시켰다. 곧바로 그의 실험은 ‘이것은 돌입니다’ 연작으로 거듭됐고 대중에게 각인된, 책 위에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떠있는 돌, 그것은 그가 찾아낸 서사의 세계를 투영 새롭게 탄생시키면서 오묘한 시공간이 담긴 그만의 공고한 영역을 구축하는 단초가 되었다. 돌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강한 일루전(illusion) 효과마저 내며 사진의 기술복제가 아닌가 의심할 만큼 세밀하게 그의 화면 위 극사실로 얹혔다. 그러나 그의 돌은 환영의 극한점에서 실물의 재현이라는 곡해를 넘어서 묘한 환상성을 드러내는데, 마치 무중력의 우주 공간에 떠있는 것처럼 부상한 자태는 너무 리얼해 그 돌에 꽂히는 순간 그 장면 너머 세계로 진입당한다. 실재가 오히려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의문과 없는듯하나 있는 어떤 세계가 존재하리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코트> 1973 캔버스에 유채 160×120cm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그 시간과 공간이 남긴 아우라와 나이테까지 화폭에 재현하고자하는 고영훈은 누구보다 무거운 족적으로 신화의 세계와 닮아 있는 지금 현실을 접목하고자 한다. 함께 했던 모든 사물, 용도 폐기된 소모품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어 입김의 그림자까지 불러내려는 그의 작업은, 이후 냄비와 구두, 삽과 목장갑 등 잡다한 생활고품들을 기억과 내러티브가 함축된 가감 없고 더욱 내면화한 모습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는 이제 도자기를 그린다. 치밀한 재현으로 사물을 실재화하고 매우 사실적인 정점에서 탈실재화 하는 작가는 일루전의 큰 맥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는, 멀거나 가까운 것의 찰나적인 현상 혹은 인간계란 거리감을 지닌 사물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 어떤 유일한 ‘하나’라는 공통분모를 낳기 위해 새로운 여정을 꾸린다. 일찍이 문명인 책 위에 돌이라는 자연을 얹었던 그는 이제 돌이 책이 되고, 책이 돌이 되도록 캔버스 모서리에 정교하게 돌가루를 묻히고 텍스트를 찍어낸다. 그는 자신이 완성한 화면은 결코 감정판이 아닌 인식판임을 확신하며 책보다 더 단단한, 비석 같은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무제> 2017 캔버스와 석고에 아크릴릭 230×420cm
고영훈
<세대 1-아버지> 2014
작가 고영훈은 1952년생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토탈미술관, 공간화랑, 가나아트센터 등 국내는 물론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쿤스트헨델, 영국 런던 살라마 카로 갤러리, 미국 뉴욕 마리사 델레 갤러리 등 해외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고 작품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소마미술관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이름을 걸었으며, ‘87 대한민국 미술기자상’, ‘제1회 토탈미술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미국 디트로이트미술관, 프랑스 루네빌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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