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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14, Jul 2024

손금 너머 선

2024.5.17 - 2024.6.6 스페이스 카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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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모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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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너머의 지금-여기로부터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강을 건너 고대 도시를 세웠던 민족은 손바닥에 그어진 금, 즉 손금의 형태로 사람의 운명을 점쳤다. 후에 ‘수상학(手相學)’이라 불리게 된 이 점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하는 숱한 방법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손바닥이라는 작은 표면 위의 주름을 두고 길고도 복잡한 생을 예측하는 수상학의 저변에는 특정한 ‘믿음’이 서려 있다.


그리고 믿음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수상학 역시 어떤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막연한 환상에서 시작된 것이 나름의 체계를 갖추게 되고, 그러한 체계가 수천 년이 넘도록 전해져 왔다면, 그때 그 환상은 여전히 환상일 수 있을까?

<손금 너머 선>에 참여한 세 작가 - 고니, 이한빈, 박광수 - 는 언제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믿음, 인간의 환상을 가시화하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저마다의 세계를 가꿔왔다. 여기서 드로잉이란 주로 선을 활용하여 어떤 이미지를 그려 내는 행위이자 그 행위의 결과물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그림에서 통용되는 스케치와 다르게,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결된 작업에 가깝다.


따라서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다’라는 말에는 드로잉과 그로부터 파생된 어떤 것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무언가가 생략되어 있다. 세 작가는 드로잉과 그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더는 드로잉은 아닌, 드로잉 너머의 무언가를 잇는 매개체로 허구의 인물을 내세운다. 완전한 타자도, 완전한 자아도 아닌 “중간자(中間者)”1)로서 등장하는 인물(혹은 인물을 지시하는 사물)은 타인과 나, 드로잉과 드로잉 아닌 것을 이으며 각자의 서사를 구축한다.



이한빈 <완강기> 2024 
완강기 사용법 표지판, 
종이에 드로잉 가변설치



전시장을 향해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끝에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다소 거칠게 그어진 선으로 유리문을 가득 채운 이한빈의 <걷는 사람>이다. 시트지에 프린트된 디지털 드로잉은 투명한 유리문에 부착됨으로써 자신이 점유하는 평면보다 더 깊은 공간으로 침투한다. 그 방향을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 전 인물의 신체 곳곳에서 보았던 별 꾸러미가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있는 풍경 위에 서게 된다(<주운 곳>).


유리문과 바닥, 벽과 벽이 맞닿는 모서리 등 공간에 기생하는 듯한 이한빈의 작업은 작가가 우연히 발견하고 수집한 현실의 파편처럼 우연한 마주침을 발생시킨다. 다만 이때 관객이 마주하는 파편들은 작가가 구현한 상상 속 인물의 흔적, 허구의 이야기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현실로부터 한발 물러서 있다. 그런데도 발 딛고 있는 땅과 밀고 들어온 문처럼 실재하는 공간에 개입하는 이한빈의 작업은 현실에서 허구로, 다시 허구에서 현실로 발돋움한다.

한편 전시장의 안쪽 코너를 가로지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박광수의 <직진>에는 평면에서 벗어나 공간으로 나아가는 듯한 형태의 인물이 등장한다. 유독 큰 손과 발을 가진 이 인물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 풍경과 뒤엉킨 채 앞을 향해 유유히 걸어간다. 빠르고 가볍게 그어진 배경의 획과 다르게 인물을 이루는 선들은 비교적 신중하고 세심해 보인다. 그 때문에 화면의 동세는 걸어가는 인물이 아닌 멈춰 있는 풍경에 치우친다. 다시 말해 서 있는 인물의 뒤로 풍경이 계속해서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고니 <오래된 혼잣말> 2024 
캔버스에 수채, 색연필, 
연필 80.3×116.8cm



어째서 그림 속 풍경과 인물은 서로 반대되는 속성의 무게와 속도를 지니게 되었을까? 작가는 “영구의 시간을 보낸 존재”2), 조각이라는 덩어리로 호명되어 유한한 생의 시간 너머를 살아온 존재를 그렸다고 한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세월을 보내온 존재, 그러나 인간의 형상을 띤 존재가 지나온 무수한 풍경을 그림에 불러온 것이다. 이 풍경을 이루는 선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전 또 다른 손에 의해 현실에 자리하게 된 어떤 인물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박광수가 (비교적) 긴 생의 시간을 지닌 존재를 그림에 등장시켰다면, 고니는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생과 그로부터 비롯된 양면적인 감정에 주목했다. 그는 드로잉을 통해 존재의 명확한 형상을 충분히 덜어낸 뒤, 잔상처럼 남은 옅은 선과 입자를 쌓아 올려 캔버스의 화면을 구축한다. 선행되는 드로잉과 이후의 회화 작업은 ‘생략’과 ‘구축’의 과정을 통해 어떠한 위계나 구분 없이 서로를 동력 삼아 이어진다.


이는 삶 속에 스며 있는 죽음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도 같다. 삶과 죽음이 겹친 장면 속에서 인물의 존재를 소거하고 남은 사물들의 초상은 엷은 얼룩 같은 얼굴로 관객을 바라본다. <밤의 물>에서 간신히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컵과 <오래된 혼잣말>에서 테이블 위로 엎질러진 물, 유령 같은 커피잔 앞에 떨어진 <섬광>은 떠나간/갈 존재의 현실을 환영과도 같은 이미지로 눈앞에 데려온다.

<손금 너머 선>은 세 작가가 드로잉과 드로잉 너머의 것으로 구현한 각기 다른 세계를 특정한 현정성을 매개로 엮어냈다. 평면과 공간, 현실과 허구, 인물과 풍경, 삶과 죽음을 오가는 것. 이 경계를 오가는 것이 어떠한 환상에 가까운 일이라 해도, 지금-여기 드로잉 너머의 것을 통해 눈앞에 현전한다면, 그때 그 환상은 여전히 환상일 수 있을까? 전시장에서 바라보던 것과 전시장 문을 닫고 나오는 길에 바라본 것 사이의 틈을 지금 여기의 내가 매개할 수 있다면.  


[각주]
1) 양기찬, <손금 너머 선> 전시 서문
2) 위의 글


* 메인 박광수 <직진> 2024 캔버스에 유채 162.2×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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