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사진, 사물의 회합
개방된 벽면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국제갤러리 부산의 환한 벽면 위로 가로세로 1m 안팎, 대체로 정사각형의 흑백 또는 컬러사진이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있다. 나무, 마네킹, 자동차, 비닐, 파라솔, 바위, 소파 등 주제나 형태에서 하나의 ‘계열’로 묶을 수 없는 피사체의 이미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붉은 자동차 옆에서 날카롭게 뻗은 용설란(<Face 3>)이나, 트럭 위에서 흘러내릴 듯 서 있는 비닐 방수포(<Face 127>), 승용차 앞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마네킹(<Face 106>) 같은 ‘비인간’ 사물들은 인간을 환기한다. 반면 회색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고개를 말고 서 있는 고양이 같은 생물(<Face 89>)은 길거리를 굴러가는 인간의 폐기물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감독 박찬욱의 첫 번째 사진 개인전 <너의 표정(Your Faces)> 전시장 풍경이다. 대학 시절부터 사진을 찍었다는 박찬욱은 이 전시를 위해 거의 항상 들고 다니는 두 대의 사진기로 2013년부터 2017년 사이 찍은 사진 중 서른 점을 골랐다.
기록영화의 문법으로 극영화를 만들었던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도 사진을 찍는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전 회화, 미술관의 관람객을 적지 않게 사진에 담았었다. 키아로스타미는 사진 덕분에 현실이 아닌 ‘상상’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찬욱의 사진은 박찬욱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했을까? 박찬욱의 렌즈는 실내와 바깥을 가리지 않고 자연이 만들어낸 사물과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 그 자리에 우연히 있는 사물, 방치된 사물, 정리된 사물을 가리지 않고 향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전시장의 풍경은 영화광 감독, 21세기 초엽 유례없는 탈냉전의 시각으로 분단 상황을 다룬 시나리오를 썼던 감독, 폭력을 심미화했던 영화사의 유산을 계승하는 복수 연작을 연출한 감독, 영화 프로덕션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 감독, 꼼꼼한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는 감독 박찬욱을 그다지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Washington, D.C.>
2013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11×111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실제로 박찬욱은 자신의 사진 작업을 소개하며 영화와 사진에서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그에게 영화는 ‘조직하는 예술’이다. 영화의 관객은 서사를 ‘받아들인다’. 반면 사진은 자율성의 예술, 기억에 해석을 더하는 예술이다. 사진의 관람객은 서사를 상상하고 ‘찾아낸다’. 박찬욱의 말은 나를 ‘찌르는’ 사진의 경험에 매혹되었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트는 사진적 경험을 상찬하기 위해 영화관 경험의 억압적인 성격을 언급했었다. 그는 영화관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미지는 ‘탐욕스러운 연속’이라고 말한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영사되는 극장에서 같은 이미지를 다시 보는 일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미지 앞에서는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이미지가 마련하는 해석의 공간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는 박찬욱이라 하더라도 바르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바르트는 영화적 이미지는 ‘생각에 잠긴 이미지’가 아니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스틸 컷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바르트처럼 영화관에서 투덜거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던 작가들은 여럿이다. 가령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와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는 정지 이미지(사진)를 찍고, 이를 운동 이미지(<환송대>, <안녕, 쿠바인들>)로 만들었다. 이들에게 사진은 이미지, 기억, 리듬, 목소리의 실험장이었다.
<Face 6> 2016 백릿 필름, LED 라이트박스
110×7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사진과 영화의 형식이 함께 촉발하는 사유의 실험장이었다. 다시, 박찬욱에게 사진은 무엇일 수 있을까? <너의 표정>에서 선보인 작업 중 ‘Face’라는 제목을 달지 않은 작품은 <Washington, D.C.>, <Hakone> 꼭 두 작품이다. <Washington, D.C.>는 영화 홍보차 들렀던 워싱턴의 한 뮤지엄에서 발견한 소파를 찍은 사진이다. 박찬욱이 담아낸 헤어진 표면의 질감 덕분에 우리는 이 피사체가 겪은 시간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박찬욱은 몹시 피곤하던 차에 이 소파를 보았다고 술회한다. 박찬욱의 사진에 기록된 것은 우연하고 고유한 만남일 뿐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영화의 바깥을 향하는 시간인 셈이다. 박찬욱은 사진으로 영화적 게임을 잠시 중단한다. 그리고 발견한다. 다른 존재를 흉내 내는 내기, 가벼운 착각, 조용한 능청 속에서 사물이 단정하게 모인다.
*<Face 16> 2013 백릿 필름, LED 라이트박스 110×7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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