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보자. ‘BTS가 전시를 연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나? 각국에서 모여든 ‘아미’들,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전시장, 끊이지 않는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 소리, 팬 아트를 연상시키는 수준의 고만고만한 작품들(대개는 초상화), 그리고 셀피. 독일의 아티스트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예술은 어려운 것입니다. 엔터테인먼트와는 다르죠”라는 말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고, 우리는 그동안 예술이라는 프레임을 쓴, 하지만 실은 스타 마케팅일 뿐인 실망스러운 전시나 협업 프로젝트를 수없이 봐왔으니까 말이다.
앤 베로니카 얀센스(Ann Veronica Janssen)
<그린, 옐로우, 핑크(Green, Yellow and Pink)>
2017 인공 안개, 그린 옐로우 핑크 필터 가변 크기
© the artist and Esther Schipper, Berlin 사진: 장준호
그러나 BTS의 아트 프로젝트 <CONNECT, BTS>는 스케일과 라인업에서부터 숱한 콜라보레이션과는 좀 달랐다. 1월 14일 영국을 시작으로 독일, 아르헨티나, 한국, 미국까지 전 세계 5개 도시에서, 5개국 22명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약 석 달간 펼치는 글로벌 프로젝트.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덴마크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제이콥 스틴슨(Jakob Kudsk Steensen)의 작품 <카타르시스(Catharsis)>로 문을 연 지 하루 뒤, 베를린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Martin Gropius Bau)에서 17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치유를 위한 의식’이 공개됐다. 곧이어 아르헨티나의 소금 사막에서 설치 미술가 토마스 사라세노의 퍼포먼스가 이어졌으며, 영국의 앤 베로니카 얀센스(Ann Veronica Janssens)와 한국 작가 강이연의 작품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이하 DDP)에서도 <CONNECT, BTS>의 막이 올랐다. 마지막 도시, 뉴욕에서는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18km에 달하는 알루미늄 선으로 구성한 입체 조형물 <뉴욕 클리어링(New York Clearing)>이 설치됐다. 한국의 이대형 디렉터가 총괄 기획을 맡아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의 서펜타인 갤러리, 베를린의 그로피우스 바우, 안토니 곰리와 토마스 사라세노를 한데 모은 전시. 요약하자면, 아트 월드에서 가장 신뢰받는 갤러리, 큐레이터, 그리고 현대미술가들이 BTS와 팀을 이루었다는 소리다. 아트와 엔터테인먼트, 양쪽 글로벌 슈퍼스타들의 만남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
<에어로센 파차(Fly with Aerocene Pacha)> 2020
© the artist and Aerocene Foundation Photo: Studio Tomás
Saraceno Licensed under CC BY-SA 4.0
by Aerocene Foundation
스타들의 아트 사랑은 오랜 트렌드다. 배우 혹은 뮤지션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이후엔 예술의 세계를 갈구하는 게 일종의 수순처럼 여겨질 정도다. 페인팅을 취미 이상으로 삼고 있는 스타들은 셀 수 없으며(하정우, 제임스 프랑코(James Franco), 짐 캐리(Jim Carrey), 얼마 전 화가로 솔로 데뷔 전시를 앞두고 있다는 페이크 뉴스를 생산한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까지!), 샤이아 라포프(Shia LaBeouf) 같은 경우엔 트럼프에 반대하는 퍼포먼스 아트를 벌이기도 했다. 세상에, 컬렉터는 또 얼마나 많나? 전 세계 아트페어 VIP 투어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 비욘세(Beyonce)와 제이지(JAY-Z), 위켄드(The Weeknd) 등이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와 함께 참석해 그들의 아트 사랑을 열렬히 피력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인스타그램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서 관람하곤 한다. 그리고 스타들은 기꺼이 아티스트의 뮤즈를 자처한다.
독일 출신 아티스트 율리안 로제펠트(Julian Rosefeldt)의 아트 필름 <매니페스토(Manifesto)>에 출연해 1인 13역을 소화하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과 관련된 선언을 선포한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부터, 『바자 아트(BAZAAR ART)』 커버를 위해 회화적 대상으로 문성식 앞에 선 5명의 배우들(윤여정, 임수정, 김옥빈, 천우희, 정은채)까지…. 특히 존재 자체가 예술인 레이디 가가(Lady Gaga)는 아티스트와의 협업에 가장 적극적인 뮤지션 중 하나다. 행위예술가 마리아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의 플래시몹 퍼포먼스에 참여했는가 하면 완벽한 나체로 요가를 하는 <아브라모비치 메소드(The Abramovic Method Practiced by Lady Gaga)>를 선보였고, 2013년에는 제프 쿤스(Jeff Koons)와 함께 앨범 <아트팝(Artpop)>의 커버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협업의 이유를 밝혔다. “과거의 대중문화는 예술 안에 포함된 장르였다. 하지만 지금의 예술은 대중문화, 즉 내 안에 있다.”
예술비평가 JJ 찰스워스(JJ Charlesworth)는 CNN에 기고한 「부와 명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순간. 왜 셀러브리티들은 아티스트가 되길 원하나(When fame and fortune are not enough-why celebrities want to be artists)」라는 칼럼에서 예술이란 스타들에게 반드시 이윤을 내야만 하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성을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주목을 받는 방법 중 하나라고 적었다. 예술 안에서 스타들은 자유롭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결론일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사실 지금의 현대미술 산업은 자아 성찰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고 크리에이티브한 자기표현, 과거 모더니스트들의 이상은 이미 사라졌다. 오늘날의 미술은 사실 소통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에 가깝다. 특히 현대미술은 개인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전 세계에 메시지를 보내고 개개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BTS의 전시는 현대미술에 몹시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상업적인 면을 (대놓고) 찾아보기 어려운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과제는 ‘다양성에 관한 긍정’이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이 진정성 있는 언어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 아닌가.
앤 베로니카 얀센스(Ann Veronica Janssens)
<그린, 옐로우, 핑크(Green, Yellow and Pink)>
2017 인공 안개, 그린 옐로우 핑크 필터 가변 크기
© the artist and Esther Schipper, Berlin 사진: 장준호
동시에 방법적으로도 여타의 사례들과는 차별성을 띤다. 이건 BTS의 전시가 다른 협업이나 스타들의 행보에 비해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정말 의도와 방식 자체에서 결을 달리 한다는 소리다. BTS는 이 전시에서 아티스트로서의 또 다른 자아를 발현하거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영감의 대상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BTS의 안무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을 재해석한 프로젝션 맵핑 작업인 강이연 작가의 <비욘드 더 씬(Beyond the Scene)>을 제외하면 BTS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없다. 안토니 곰리도, 토마스 사라세노도 모두 이제껏 해왔던 본인들의 작업을 그대로 이어갔다. 지난 20년간 태양열과 바람을 연료로 움직이는 열기구 실험을 해온 토마스 사라세노는 <CONNECT, BTS> 전시 기간 내에도 같은 작업의 일환인 <플라이 위드 에어로센 파차(Fly with Aerocene Pacha)>를 선보였는데, 화석 연료 없는 열기구로서는 고도, 거리, 지속시간에서 모두 세계 기록을 갱신했다. 그 후 이 열기구는 무려 여섯 번이나 기네스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날아올랐다. 스페인어로 ‘물과 생명은 리튬보다 더 가치 있다’라는 문장을 단 채.
요지는, <CONNECT, BTS>는 무작정 BTS 혹은 아미를 위한 전시라는 오해를 사기 쉬운, 하지만 실체는 전 세계 5개 도시에서 BTS가 예술 작업을 ‘지원’하는 글로벌 공공예술 프로젝트라는 거다. 사실 각각의 작품보다는 이 프로젝트 자체가 BTS와 닮아있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진은 1월 14일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 오프닝에 화상 연결로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살아온 문화도 다르지만 이렇게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고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함께 모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달라서 분리되는 세상이 아니라, 각자의 다양성이 서로 ‘연결’된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2019 ‘빌보드 뮤직 어워드(Billboard Music Awards)’에서 세계적인 팝 가수 할시(Halsey)와 함께 한국어로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를 부르던 BTS의 무대, 그에 환호하던 전 세계 아미들의 모습이 절로 떠오르는 얘기다. 또한 프로젝트 오프닝에서 이번 전시를 총괄 기획한 이대형 아트 디렉터는 “단절과 분열, 갈등과 반목을 치유하기 위해 어떻게 음악과 미술, 디지털과 아날로그, 글로벌과 로컬,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고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번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고 설명했는데, 이 새로운 연대는 아마 예술계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번 전시가 현대예술 세계에 새로운 관람객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것도 그간 (편견일지도 모르겠으나) 현대미술에 크게 관심이 없을 것이라 굳게 믿어왔던 아이돌 문화의 추종자들 말이다!
강이연 <연속체(Continuum)> 2019 프로젝션 맵핑
설치 이미지 제공: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실제 DDP에서 마주한 <CONNECT, BTS>의 풍경은 이제까지 봤던 어떤 전시와도 달랐다. 핑크색 머리를 한 Z세대와 중년의 일명 ‘이모님 팬’들, 외국에서 온 아미와 우리나라의 아미들, 다양한 인종, 세대가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긴 줄을 서 있었다. BTS의 공연에 온 것처럼 묘하게 들떠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진중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전시를 관람했다. 조용히 도슨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DDP의 작품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CONNECT, BTS>에 대한 설명을 유심히 읽었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런던 <CONNECT, BTS>의 개막 날이었던 1월 14일 K-pop 전문 유튜버 TTK(Twins Talk K-pop)가 서펜타인 갤러리 앞을 찾아 “지금은 비 오는 화요일 오후 1시인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갤러리 앞에 줄 서 있다”면서 전시를 팔로업하는 영상은 이런 말로 끝난다. “오늘 굉장히 문화적인 하루를 보낸 기분이 든다.
나는 오늘 예술을 관람했다.” 상황이 이러니 안토니 곰리가 『가디언(The 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참신하리만큼 이상적인”이라고 표현한 이번 프로젝트의 취지, BTS가 가진 메시지를 시각 예술을 통해 기존의 아트 피플과 대중 음악 팬들 양쪽에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예술계는 비교적 고립적이고 여전히 자기 세계에 갇혀있다. 그런데, 수백만 명의 팬들을 가진 이 젊은이들이 전혀 새로운 종류의 관람객들에게 다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그걸 거절할 수 있겠나?”
이 지점이야말로 <CONNECT, BTS>가 열어젖힌 어떤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협업을 지켜보면서 당연히 패션이나 엔터테인먼트계에서 일방적으로 예술을 갈망한다고, 러브콜을 보내왔다고 믿어오지 않았나. <CONNECT, BTS>는 그동안 견고하게만 보였던 예술계에서도 역시 스타를 비롯한 엔터테인먼트와의 협업에 대한 갈증, 대중들과의 관계를 확장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어설프게 영감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프로젝트의 후원자라는, 새로운 콜라보레이션의 방식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앞서 말한 안토니 곰리 인터뷰 기사 타이틀은 사실 우리 모두가 묻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다. 바로 ‘왜 안토니 곰리는 K-pop 슈퍼스타인 BTS와 협업을 했나(Why Antony Gormley teamed up with K-pop superstars BTS)’ 라는 질문. 그에 대한 안토니 곰리의 명쾌한 답은 아마 <CONNECT, BTS>를 요약하는 한 문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희망의 행보입니다(An Act of Hope).”
글쓴이 권민지는 패션 매거진 『엘르』 디지털 피처 에디터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바자』와 『바자 아트』에서 피처 에디터로, JTBC 플러스의 디지털 본부에서 근무했다. 한동안은 『GQ』와 『바자』, 『엘르』, 『코스모폴리탄』 등 다양한 패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의 칼럼리스트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현재는 웹과 소셜미디어라는 디지털 플랫폼에서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문화, 아트, 라이프스타일 등 각 분야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콘텐트화 하는 일을 하는 중이다.
이대형 아트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