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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14, Jul 2024

미술품, 도난과 위작

Art Theft & Forgery

●기획 · 진행 김미혜 수석기자, 김성연 기자

Raumansicht Makart-Saal 'Der Einzug Karls V. in Antwerpen' 1878 Öl auf Leinwand 520×950cm Mitte links © Hamburger Kunsthalle / bpk Foto: Fred D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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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연 기자,이연식 미술사가,이유경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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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본디 사라질 운명을 타고났어도 작품은 아니다. 마지막 붓질을 간직한 채 정지된 미술 작품은 그 고유성과 희소성에 의한 아우라로 수많은 이의 각기 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 혹은 목적으로써 인류와 함께 호흡한다. 이번 특집은 미술계 질서를 교란하고 작가의 예술혼을 파괴하는 미술품 도난과 위작 사건을 다룬다.

도난부터 시작한다. 최근 발생한 도난 사건들을 간략히 훑고 이 같은 수모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는지 등을 살핀다. 이어 세계를 놀라게 만든 여덟 가지의 전대미문 도난 사건으로 허상에 불과한 미술품 도난을 둘러싼 근본적 담론과 절도 유형들을 생생히 확인한다.

이후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처럼 미술사를 괴롭혀 온 위작들 그리고 염치없이 태연했던 위작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끝으로 현시점 요구되는 도난, 위작 범죄 관련 법적 제재와 더불어 미술품 거래 시장이 어떤 현실에 놓였는지 다양한 판례를 바탕으로 면밀히 알아본다. 시대를 가로지르며 여전히 난무 중인 범죄들로부터 미술을 구하는 논의들이 여기 있다.


SPECIAL FEATURE 1  
도난: 미술을 찾습니다_김성연
 
SPECIAL FEATURE 2  
위작: 미술의 세계에 내린 저주와 역설_이연식  

SPECIAL FEATURE 3  
도난 미술품 및 위작 거래에 대한 법제_이유경




크리스토퍼 월리스(Xopher Wallace)
 ‘Sleepwalker Project’ Courtesy of Xopher Wallace



Special Feature No.1-1
도난: 미술을 찾습니다
● 김성연 기자


미술품 도난, 뒤틀린 매혹

“미술사에서 반 고흐가 갖는 의미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나요?”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반 고흐 특별 전시실에서 한 남성이 묻자, 전시 담당 도슨트가 답한다. “아, 중요한 질문이군요. 제게 반 고흐는 당대 최고의 화가입니다. 물론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위대하며 가장 사랑받는 화가임이 틀림없죠. 색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워요.

그는 찢어질 듯한 삶의 아픔을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죠. 고통을 묘사하기는 쉽지만, 그 열정과 고통을 통해 이 세상의 찬란함, 환희,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이전에는 아무도 해내지 못했죠. 아마 앞으로도 다신 없을 겁니다. 프로방스의 들판을 거닐던 그 방랑자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질문한 남성은 답변에 흡족한 듯 미소를 짓다 이내 옆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빈센트?”라 말하며 홀로 훌쩍이고 있는 한 사내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여기 눈가가 촉촉해진 붉은 오렌지빛 머리색 사내,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다. 2010년 방영된 영국 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 시즌 5의 열 번째 에피소드 속 한 장면이다. 당연히 허구인 이 이야기는 생전 인정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다 스스로 삶을 포기한 반 고흐가 자신의 그림이 마침내 수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기쁨의 순간을 담는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하녀와 편지를 쓰는 여인
(Lady Writing a Letter with her Maid)>  
1670-1671 캔버스에 유채 71.1×58.4cm



이 같은 상상에도 전제는 필요하다. 작가가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그의 손길이 머문 작품은 존재한다는 조건 말이다. 미술을 둘러싼 범죄 중에서도 미술품 도난은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흔적 없이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 자체이기에 이로 인한 피해는 주관적, 객관적 기준을 막론하고 막심하다. 지난해 9월, 2020년 사라진 반 고흐의 <봄 뉘넌의 목사관 정원(The Parsonage Garden at Nuenen in Spring)>(1884)이 비닐 완충재와 베갯잇으로 감싸진 채 구겨진 파란색 이케아 가방에 담겨 돌아왔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반지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그림 등을 되찾은 네덜란드 미술 전문 탐정 아서 브랜드(Arthur Brand)가 활약한 덕분이다. 공교롭게도 반 고흐의 생일에 행적을 감췄던 작품은 복원을 거쳐 올해 3월 네덜란드 그로닝거 박물관(Groninger Museum)에서 다시 공개되었다.

대중의 지지와 도난의 발생 빈도가 비례라도 하듯 반 고흐의 작품은 세계 각국의 도난 사건에 휘말렸다. 그중 <양귀비꽃(Poppy Flowers)>(1887)은 1977년, 2010년 이집트 모하메드 마흐무드 칼릴 박물관(Mohamed Mahmoud Khalil Museum)에서만 두 차례 도난을 당했다. 작품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신윤복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1811)가 사라져 신고 절차를 밟은 것이 지난 6월 밝혀졌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봄 뉘넌의 목사관 정원
(The Parsonage Garden at Nuenen in Spring)> 
1884 패널, 종이에 유채 25×57cm



2008년 일본 개인 수집가에게 사들여 국내로 197년 만에 돌아온 작품이 실종된 것이다. 5월 말엔 2015년 도난당한 영국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호세 카펠로의 초상 연구(Study for Portrait of Jose Capelo)>(1989)가 회수되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주택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그의 작품 다섯 점 중 세 점을 2017년 발견한 데 이어 이번에 되찾은 한 점은 500만 유로(한화 약 74억 원) 상당으로 평가받는다.

비단 작고 작가에게만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2023년 12월 22일, 런던 남동부 페컴 지구 한 교차로의 빨간색 정지 표지판 위에 군용 드론 세 대가 날아가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 등장했다. 영국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Banksy)의 작품이었다. 이날 정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 작품 촬영 사진을 올림으로써 본인 작품임을 인증했고, 이는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대낮, 정체 모를 두 남성이 절단기로 그림을 잘라 도주했다. 목격자들이 촬영한 영상이 유포되어 이튿날 남성 한 명이 절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뱅크시의 작품이 도난당한 사례는 이전에도 누차 있었다.

희소성은 가치의 일반적인 척도다. 고유성과 맞닿는 이 기준은 미술품이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사고파는 대상임에도 마냥 같은 시선과 방식으로 거래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별도의 대가를 내지 않고 감상만으로 미감에 의한 충만함, 지적 교양 증진 등 무수한 무형의 효용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미술품 관련 범죄 사건이 갖는 파급력과 특수성도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온실에서(In the Conservatory)> 1878/1879 
캔버스에 유채 115×150cm



소유는 미술품 경매든 절도든 각 과정에서 수반될 수밖에 없는 행위다. 수집가의 소장품이 미술시장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견한 소더비 명예 회장 피터 윌슨(Peter H. Wilson)은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 작품을 탐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 마음이 사라진다면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소유하고픈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라 말하며 미술품의 아름다움을 사적인 영역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드리우는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파악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이 단순히 소장과 투자에 뜻이 있는 것을 넘어 기울어진 개인적 만족감을 위해 배후에서 범죄까지 감행하는 악질 컬렉터들의 욕망까지 정당화하진 못한다.

미술품 도난 사건은 이해관계와 양상에 있어 차이를 둘 뿐 결국 경제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그렇기에 미술품이 물리적 사물인 동시에 실존하는 미술 그 자체라는 사실을 더욱더 잊지 않아야 한다. 미술품은 살아있는 예술로서 후대에 전해져야 할 일종의 사료이자 시대의 유산이기에 관련 제도와 방침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는 것은 물론, 그 예술성을 지속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본질적 의미를 재고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2일 뱅크시(Banksy) 
우크라이나 벽화 절도 사건 현장 
이미지 제공: refluence/Shutterstock.com




수단과 목적 그 사이


미술품 도난에 낭만 같은 건 없다. 영화 속 미술품 도둑들의 모습은 보기 좋게 재단된 허상에 불과하다. 현실에선 악질 범죄자들이 단순 돈을 목적으로 절도를 감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술품 절도는 마약 거래, 돈세탁을 포함한 각종 사기, 불법 무기 매매 등의 강력 범죄와 연관되어 조직범죄 형태로 이뤄지므로 그 끝엔 고통과 폭력만이 자리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특히 1980년대부터 미술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미술품 도난 건수도 급증하기 시작한다.

미술품이 도둑들의 표적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후 경제위기, 팬데믹 등의 다양한 요인에 따라 시장 규모는 축소되기도 했으나 미술품 도난 사건은 여전히 매해 증가 중이다. 세계 유수의 미술 기관과 개인 수집가들이 보안 시스템을 개선해 이를 예방하려 했음에도 말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자 도난 기술 역시 다각도로 발전했다. 일부 도둑은 가치 있는 작품을 정확히 겨냥할 수 있도록 드론을 활용해 미술관 위를 탐색하기도 하고, 다른 도둑들은 3D 프린팅 기술로 원본과 거의 유사한 복제품을 제작한 다음 이를 암시장에 판매해 수익을 창출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하기 위해 2018년 인터폴은 베트남 공안부와의 심포지엄 이후 미술품 절도, 위조, 불법 밀매 방지를 위한 국제적 협력을 촉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인터폴 미술품 담당 코디네이터 코라도 카테시(Corrado Catesi)는 “훔친 미술품이 마약, 무기, 위조품 밀매만큼 수익성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조직범죄 집단에 미술품 절도가 점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피력했다. 미술품 절도를 테러, 살인, 성폭력 등과 같은 범죄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대하게 여겨온 결과로 반복된 지난날들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위기의식을 갖고 전문 방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견해다.


1945년 4월 24일 독일 남부 도시 엘링겐의
 성 게오르크 교회(St.Georgenkirche)에서 
발견된 독일군 전리품을 검사하는 미국 제3군 병사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USA



미국 범죄학자 존 콘클린(John E. Conklin)은 『미술품 범죄(Art Crime)』(1994)에서 미술품 절도 범죄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째, 작품을 직접 또는 누군가를 통해 판매할 생각으로 미술품을 훔치는 부류. 둘째, 누군가의 사주로 돈을 받고 미술품을 훔치는 부류. 셋째, 소유주에게서 작품의 몸값을 뜯어내거나 보험사에 되팔거나 아니면 모종의 간접 거래를 할 작정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소위 ‘예술품 납치(art napping)’에 기반해 도난 행각을 벌이는 부류. 넷째, 자신이 간직하고 싶어 작품을 훔치는 부류. 다섯째, 상징적 또는 정치적 목적으로 절도를 저지르는 부류. 그리고 그가 나눈 유형엔 속하지 않는 여섯째, 이 모든 경우에 속하지 않는 부류 또한 존재한다.

도난 사건 대다수는 앞선 세 가지 유형에 해당한다. 이외 유형은 상대적으로 드물기에 더욱 짙은 인상과 충격을 남긴다. 소유하기 위해 도난을 저지른 인물로 프랑스 출신 도둑 스테판 브라잇위저(Stéphane Breitwieser)를 빼놓을 수 없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총 300점가량의 미술품을 훔쳤는데, 그 가치는 20억 달러(한화 약 3조 원) 이상이 넘어간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예술을 위한 감옥(prison for art)”이라 칭한 그는 판매에 목적을 두지 않고 오직 소장을 위해 작품을 훔치고 복역한 후에도 추가 수색 과정에서 또 다른 미술품들이 발견되어 재수감된다.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들로 개인 미술 컬렉션을 갖고 싶었던 자신의 허황한 욕망을 돌이켜보는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정치적 목적에 기반한 미술품 탈취 사건은 나치 정권의 유럽 예술품 약탈 사건이 대표적이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독일 총리가 되자 자신의 통제 영역에 있는 국가들의 미술품들을 입수하기 위해 갖은 정책을 조직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나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한다는 목적은 거들 뿐이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토르토니 카페에서(Chez Tortoni)> 
1875 캔버스에 유채 26×34cm



린츠에 설립될 총통 박물관(Führermuseum)에서 전시될 작품들을 모으기 위한 히틀러의 열망 그리고 그와 함께 예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심복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의 탐욕이 만나 바로 진행되었다. 관련 전문 권력 기구도 세워 체계성을 더하고자 했는데, 이때 세워진 조직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ERR(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이다. 이 시기 몰수된 작품은 약 500만 점에 이른다.

1974년 4월 26일 무장한 아일랜드 공화당원들이 로즈 더그데일(Rose Dugdale)이라는 IRA 여성 회원과 함께 “아일랜드를 위해 싸울 자유와 아일랜드 국민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영국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알프레드 베이트(Alfred Beit) 경의 집에 침입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하녀와 편지를 쓰는 여인(Lady Writing a Letter with her Maid)>(1670-1671)을 비롯해 작품 19점을 가져간 사건도 유명하다. 그의 저택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두 차례, 사후에 두 차례씩 미술품 절도범의 표적이 되었고, 알프레드 경은 총 43점을 도난당했다.

모두가 안다. 아이가 사라지면 정신없이 아이를 찾듯 도난당한 미술품 더 나아가 미술을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찾아 헤맬 순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변화는 분명 필요하다. 미술이 계속해서 정당치 못한 각종 어두운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볼모일 순 없으니 말이다. 잃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 수많은 미술을 앗아간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했다. 예술가의 손길로 태어나 의지는 부여받지 못했으나 그 의미만큼은 넘치는 미술품들의 수난사, 지금 시작한다.PA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모나리자(Mona Lisa)> 1503 
패널에 유채 77×53cm




Special Feature No.1-2


1911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

1911년 8월 22일 프랑스 화가 루이 베루(Louis Béroud)는 평소처럼 모작 연습을 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을 찾았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Mona Lisa)>(1503)가 걸려 있어야 할 벽에 못 네 개만 남아 있는 모습을 가장 처음 발견한다.

박물관 측은 사진 촬영 목적으로 작품이 어딘가에 잠시 옮겨진 줄 알았다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뒤늦게 도난 사실을 인지해 일주일간 박물관 폐관을 결정한다. 용의자로 프랑스 모더니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지목되기도 했고, 그의 친구인 피카소도 소환되어 조사받았다. 물론 두 사람은 무죄였다.

진범은 이탈리아인 빈센조 페루자(Vincenzo Peruggia)로 밝혀졌다. 그는 2년 동안 집 난로 밑에 숨겨두었던 그림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관장에게 팔려던 과정에서 붙잡혔다. 박물관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잠입해 도난에 성공한 그는 작품이 다 빈치의 고국인 이탈리아로 반환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절도했다고 진술한다. 사건의 배후엔 다른 속셈과 이해가 오가고 있었지만,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는 이 주장으로 이탈리아 국민에게 적지 않은 지지를 받는다.

작품은 피렌체, 로마, 밀라노에서 전시된 후 12월 31일 파리로 돌아왔다. 대서특필된 도난 사건을 계기로 <모나리자>는 미술사적 재평가에 힘입어 박물관을 구성하는 여러 작품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과거를 뒤로한 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Portrait of the Duke of Wellington)> 
1812-1814  마호가니 패널에 유채 64.3×52.4cm



1961년 고야의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 도난 사건

<모나리자>가 사라졌던 그날로부터 50년이 흐른 1961년 8월 21일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 전시돼 있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작품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Portrait of the Duke of Wellington)>(1812-1814)가 사라졌다. 나폴레옹 시대를 종식한 영국군 총사령관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를 그려 영국에 큰 상징성이 있는 작품이 하루아침 사이 도난당한 것.

그 내막은 4년 후 밝혀졌다. 그림을 훔쳤다고 자백한 켐프턴 번턴(Kempton Bunton)은 전문 미술품 절도범과 거리가 멀었다. 장애인 연금 수급자인 그는 자신의 적은 수입으로 BBC TV 수신료를 내야 한다는 현실에 화가 나 절도를 감행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왜 하필 이 그림을 훔쳤을까.

1961년 내셔널 갤러리는 미국 석유회사 경영인이자 컬렉터인 찰스 비어러 라이트먼(Charles Bierer Wrightsman)의 수중에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재무부의 특별 보조금과 울프슨 재단(Wolfson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14만 파운드(한화 약 70억 원)에 작품을 매입한다. 소식을 접한 번턴은 그 큰 금액을 내놓는 정부가 누군가에겐 TV가 사치처럼 느껴지도록 수수료를 부과하는 것에 격분한다. 그렇게 항의를 목적으로 절도를 결심한 그는 미술관 경비원과의 대화를 통해 전자 보안 시스템이 청소 시간인 이른 아침에 비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접한다.

그 결과 화장실 창문을 거쳐 잠입에 성공한 번턴은 액자까지 훔쳐 달아난다. 그는 언론사에 작품 경매가 금액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도둑을 사면해 준다면 초상화를 반환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거듭 무시당한다. 결국 4년 후 자신의 범행임을 자백한다. 후속 재판에서 번턴의 절도 의도에 기반해 그는 그림 절도 혐의에 있어선 무죄를 받고 액자 절도에 대한 혐의만 인정받아 3개월 동안 복역한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성 프란체스코와 성 로렌스가 함께한 탄생
(The Nativity with Saint Francis and Saint Lawrence)> 
1609 추정 캔버스에 유채 268×197cm



1969년 카라바지오의
<성 프란체스코와 성 로렌스가 함께한 탄생> 도난 사건

미술품 전문가들은 <성 프란체스코와 성 로렌스가 함께한 탄생(Nativity with Saint Francis and Saint Lawrence)>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가 죽기 1년 전인 1609년 시칠리아에서 완성되었다고 추정한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예수가 태어나던 날의 풍경을 묘사한 그림은 빛과 그림자의 대담한 조화를 통해 성경의 한 장면을 생생히 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수작은 1969년 10월 이탈리아 성 로렌스 성당에서 도난당했다. 성당에 침입한 두 남성은 높이 2.4m에 이르는 그림을 액자에서 잘라내 탈출했다. 이탈리아 경찰, 인터폴, FBI 모두가 전방위로 그림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한다.

그로부터 27년이 흐른 1996년 이탈리아 전 총리 줄리오 안드레오티(Giulio Andreotti)에 대한 마피아 협회 재판에서 사건은 다시 대두된다.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원 프란체스코 마리노 마노이아(Francesco Marino Mannoia)는 자신이 절도에 가담했다고 자백하며, 한 개인 컬렉터가 강도로 훼손된 그림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판매를 취소했다고도 말했다. 그는 나폴리 대지진으로 그림이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으나 위치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2009년 또 다른 시칠리아 마피아 가스파레 스파투차(Gaspare Spatuzza)는 1999년 자신이 마피아 회원 필리포 그라비아노(Filippo Graviano)와 함께 수감 생활할 때 그가 그림은 이미 1980년대에 파괴되었다고 말했다며 이를 전했다. 그 밖에도 헛간에 숨겨 놓은 그림을 생쥐나 돼지가 먹었다, 불에 타버렸다, 동유럽 혹은 남아프리카 수집가에 팔렸다, 마피아 조직의 어둠의 컬렉션에 추가되었다는 등 다양한 의혹에 휩싸인 작품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러브레터(The Love Letter)> 1669-1670 
캔버스에 유채 44×38.5cm



1971년 페르메이르의 <러브레터> 도난 사건

1971년 9월 23일 브뤼셀 미술 센터(Centre for Fine Arts), 페르메이르의 <러브레터(The Love Letter)>(1669-1670)가 도난당했다. 기획전을 위해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에서 대여해 온 작품을 잃어버린 것. 범인은 21세 호텔 웨이터 마리오 피에르 로이만스(Mario Pierre Roymans)였다.

그는 박물관에 몸을 숨기고 있다 문을 닫자 벽에 걸린 그림을 떼어내고 창밖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액자가 창문보다 큰 탓에 감자 껍질 벗기는 도구로 액자에서 캔버스를 잘라내 그림을 뒷주머니에 은폐했다. 머물던 호텔 방에 그림을 숨겼다가 나중엔 숲에 묻어 두기도 했는데 비가 내리자 다시 방에 가져와 베갯잇 안에 넣었고, 이 과정들로 그림은 상당 부분 훼손된다.

10월 3일 밤, 로이만스는 벨기에 신문사 『르 수아르(Le Soir)』의 기자에게 연락해 만남을 청한다. 기자에게 카메라만 지참해서 한 소나무 숲에서 만나자고 했고, 조수석에 기자를 태운 다음 눈을 가린 채 그를 어느 한 교회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흰색 천에 담긴 그림을 보여주고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옆에서 약 10장 정도의 사진을 찍게 한다. 로이만스는 기자에게 “나는 예술을 사랑하지만 인류도 사랑한다”며 인류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며 제 생각을 말했다고. 사진은 그의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과 함께 공개되었다.

기근에 시달리는 방글라데시 벵골의 전쟁 난민들에게 2억 벨기에 프랑을 제공하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과 브뤼셀 미술 센터에 세계 기근 퇴치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캠페인을 조직하면 훔친 그림을 돌려주겠다는 것. 10월 6일까지 요구를 들어달라고 한 그는 그날 주유소 주인의 제보로 경찰에 체포된다. 법원에서 벌금과 2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로이만스는 6개월만 복역했고, 손상된 작품은 복원되는 데 1년 가까이 걸렸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 
1872  캔버스에 유채 48×63cm



1985년 모네 <인상, 해돋이> 도난 사건

1985년 10월 27일 한낮, 파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1872)를 비롯한 그림 아홉 점이 절도됐다. ‘인상주의(Impressio nism)’란 용어가 이 작품에서 착안되었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이 범죄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사건 당일 도둑들은 표를 구매해 미술관에 입장한 다음 재빨리 복면을 썼다.

그들 중 일부가 보안요원과 관람객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위협하는 사이 나머지 도둑들은 유리 케이스를 깨뜨려 작품들을 가지고 달아난다. 사라진 그림 중 대부분이 모네의 그림이었고,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던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의 그림도 있었다. 현장을 벗어난 강도들은 회색 세단 트렁크에 작품들을 싣고 도망간다.

범인은 2년 뒤에 밝혀졌다. 미술품 절도 담당 부서 국장 미레유 발레스트라찌(Mireille Balestrazzi)는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의 그림을 되찾기 위해 떠난 일본에서 마르모탕 미술관 도난 작품 중 하나를 일본인 수집가가 사들이려 했다는 한 제보를 받는다. 내막에 있는 인물은 일본인 야쿠자 후지쿠마 슈이니치(Shuinichi Fujikuma). 그는 코로의 그림을 소유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마르모탕 미술관에서의 절도를 주도한 범인 중 한 명이었다.

슈이니치는 1978년 헤로인 소지 혐의로 프랑스에서 5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 미술품 절도 조직의 일원인 필립 자민(Philippe Jamin)과 유세프 키문(Youssef Khimoun)을 알게 되어 그들과 절도를 계획한 것이었다. 도난당한 작품은 1990년 프랑스 섬 코르시카(Corsica)의 마을 포르토베키오(Porto Vecchio)에 있는 빈 빌라에서 모두 회수되었다.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갈릴리 바다의 폭풍 (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1633  캔버스에 유채 160×128cm



1990년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도난 사건

1990년 3월 18일 자정 직후,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을 기리는 행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보스턴 경찰로 변장한 두 남성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의 직원용 출입문에 들어선다. 야간 경비원 두 명을 결박한 후 이들은 약 90분 동안 총 5억 달러(한화 약 7,000억 원) 상당의 가치를 지닌 13개의 작품을 갖고 도주한다. 단 한 점도 돌아오지 못한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이자 전 세계 역대 최악의 미술 범죄로 기록된다.

사라진 작품들 가운데 베르메르의 <세 사람의 연주회(The Concert)>(1664),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유일한 바다 그림 <갈릴리 바다의 폭풍(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1633)과 <검은 옷을 입은 신사와 숙녀(A Lady and Gentleman in Black)>(1633),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토르토니 카페에서(Chez Tortoni)>(1875)는 특히 높이 평가받는 것들이다.

유통할 수도, 현금화할 수도 없는 작품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관련된 중요 단서들도 발견되었고, 각종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사건은 아직 미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다. 생전 모든 소장품이 자신이 배치한 대로 있어야 하며 이를 어기면 박물관을 폐쇄하겠다는 가드너의 유언에 따라 도난당한 작품들이 있던 액자는 여전히 텅 빈 채로 그것들을 기다리고 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절규(The Scream)> 
1893 판지에 유채, 템페라, 파스텔, 크레용 91×73.5cm



1994년 뭉크의 <절규> 도난 사건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훗날 자신의 대표작이 될 <절규(The Scream)>를 네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그중 두 버전의 작품이 각각 1994년, 2004년 도난당했다. 최초의 도난은 1994년 2월 12일 아침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Nasjonalmuseet for Kunst) 2층에서 발생했다. 범인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유리창을 깬 다음 액자 속 <절규>(1893)를 떼어내는 데 성공한다.

미술관은 보안 카메라와 경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늦은 반응 속도와 안일한 대처로 인해 강도들을 놓치고 만다. 도망친 범인들은 범행 장소에 “허술한 보안에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남긴 채 행적을 감췄다.

그날은 릴레함메르(Lillehammer) 동계올림픽 개막날이었다. 언론들은 일제히 해당 사건을 보도했고 이로써 전 국민의 관심이 <절규>의 실종에 집중되었다. 곧바로 조사에 나선 노르웨이 수사대는 몇 주 후 한 영국인 전과자의 제보를 계기로 영국 수도경찰청의 미술품 전담 수사대와 합동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그 결과, 협업한 두 조직은 함정 수사를 통해 납치된 작품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10년이 지난 2004년 8월 22일 일요일 대낮 오슬로 뭉크 미술관(Munch Museum)에서 무장한 2인조 강도에 의해 또 다른 <절규>(1910)가 <마돈나(Madonna)>(1894)와 도난당한다. 두 작품은 2년이 지난 2006년 8월 31일 회수되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Red Vest)> 
1888-1890 캔버스에 유채 80×64.5cm



2008년 에밀 뷔를레 재단 박물관 도난 사건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오후 폐관을 30분 앞둔 시각, 복면을 쓴 괴한 세 명이 스위스 취리히 에밀 뷔를레 재단 박물관(Foundation E.G. Buhrle)에 침입했다. 한 명이 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이 나머지 두 명은 인상파 작품 네 점을 훔쳐 현장을 떠났다. 스위스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당시 피해액은 1억 6,300만 달러(한화 약 1,800억 원)에 이른다.

사라진 그림은 폴 세잔(Paul Cézanne)의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The Boy in the Red Vest)>(1888-1890),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레픽 백작과 그의 딸들(Ludovic Lepic and His Daughters)>(1871), 모네의 <베퇴유 부근의 양귀비(Poppy Field near Vétheuil)>(1879), 고흐의 <꽃이 핀 밤나무(Blossoming Chestnut Branches)>(1890).  

며칠 뒤 인근 한 정신병원 주차장에서 범행에 사용된 차량이 발견되었고, 차 트렁크엔 모네와 고흐의 작품이 손상 없이 놓여 있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12년 4월, 세잔의 그림도 돌아왔다. 세르비아 경찰이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에서 복면강도 3명을 체포해 그림을 되찾은 것. 세잔과 드가의 그림도 지금 에밀 뷔를레 재단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작품들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한 가지 더 알아두자.

이곳은 독일 출신 에밀 게오르그 뷔를레(Emil Georg Buhrle)가 수집한 미술품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그는 나치 정권 시절 군수 사업자로서 막대한 돈을 벌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지금의 화려한 컬렉션을 갖췄다. 작품의 가치를 알고 돈을 지불해 구매한 것임에도 전문가들은 여전히 그의 작품 소유권에 대한 추가적인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피터르 클레즈(Pieter Claesz)
<Still Life with a Skull and a Writing Quill>
1628 나무에 유채 24.1×35.9cm




Special Feature No.2
위작: 미술의 세계에 내린 저주와 역설 
● 이연식 미술사가


한쪽은 가짜, 한쪽은 진짜

여기 소묘가 두 점 있다. 한쪽은 진짜고 다른 한쪽은 가짜다. 한쪽은 프랑스 화가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가 19세기에 앙리 르루아(Henri Leroy)라는 소년을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고, 다른 한쪽은 그 소묘를 에릭 헵번(Eric Hebborn)이라는 화가가 베껴 그린 것이다. 헵번은 위작 제작자로 유명한데, 그런 그가 1991년에 내놓은 자서전 『곤경에 빠져서(Drawn to Trouble)』에 이처럼 두 점을 나란히 실어 놓고는 독자들 스스로 감정가로서의 역량을 시험해 보라고 권했다.

“완전히 초보자라도 맞힐 확률은 반반이다. 천천히 주의 깊게 살펴보시라. 그리고 코로가 확신을 하고 내리그은 강한 선과 그것을 모사하느라 주저하며 그은 선을 구분해 보시라.” 위작은 엄연히 불법이고 창작의 원칙과 미술시장의 질서를 교란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헵번이 이처럼 기세등등했던 이유는 뭘까? 위작은 미술사의 그늘과 같은 존재다.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을 통해 시민계급이 사회의 주역이 되고 이들의 문화적 욕구가 높아지면서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는 국제적인 미술시장이 성립되었는데, 미술품의 매매가 활발해질수록 위작 또한 번성했다.

위작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복제’다. 복제는 말 그대로 원작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늘날 복제라는 방식은 위작 제작에 거의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만약 동네 커피점의 벽에 걸린 <모나리자(Mona Lisa)>(1503)를 본다면 당연히 복제품이라고 여길 것이다. 진짜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는 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고 매체의 영향력이 확산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좌: 에릭 헵번(Eric Hebborn)이 그린 소묘
우: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가
그린 소묘



홀바인과 모작


1871년 8월, 독일의 드레스덴에서는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작품을 모아 소개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전시에는 서로 비슷한 두 점의 ‘성모자’가 등장하여 주목받았다. 한 점은 <다름슈타트의 성모자(Darmstädter Madonna)> (1526), 다른 한 점은 <드레스덴의 성모자(Dresden Madonna)> (1635-1637)였다. 애초에는 1526년, 바젤의 시장 야코프 마이어 춤 하젠(Jakob Meyer Zum Hasen)이 홀바인에게 성모자를 그려달라고 했다. 이 그림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왕관을 쓴 성모의 모습과 함께 시장 자신, 시장의 전처와 후처, 딸, 그리고 이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청년과 아기가 담겼다.

1638년에 르 블롱이라는 화상(畵商)이 바르톨로메우스 자르부르흐(Bartholomaus Sarburgh)라는 화가에게 이 그림을 베껴 그리게 시켰다. 그렇게 만든 모작을 르 블롱은 홀바인의 진품이라며 당시 프랑스 왕비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에게 팔았다. 이 뒤로 원작과 모작은 각각 주인이 바뀌어 옮겨 다닌 끝에 <다름슈타트의 성모자>와 <드레스덴의 성모자>로 알려졌다. 1822년에야 사람들은 홀바인의 <성모자>가 두 점이라는 걸 알았다.

<다름슈타트의 성모자>와 <드레스덴의 성모자>, 둘 중 한 점은 원작이고 다른 한 점은 모작이다. 1871년 전시에서 <다름슈타트의 성모자>가 원작이고 <드레스덴의 성모자>가 모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론이 이 전시에 맞춰 내려진 것일 뿐, 앞서 오랜 기간 여러 연구자가 논의를 진행해 왔던 터였다. 모작에는 원작을 흉내 내어 그리면서 변형시킨 부분이 있다. 변형시킨 부분은 원작의 구성요소에 담긴 긴밀하고 필연적인 성격과 달리 불필요한 사족처럼 느껴진다.

<드레스덴의 성모자>에서 아래쪽의 소년이 관객 쪽을 바라보는 건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 성모자 양편의 기둥을 조금 늘인 것은 그림의 구성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 그림에 애착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던 드레스덴 시민들은 감정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 반박문까지 냈지만, 이때 내려진 결론은 오늘날에도 인정되고 있다.

이때 연구자들이 두 점의 <성모자>를 비교하는 과정은 얼른 생각해도 쉽지 않았을 터이다. 오늘날 우리는 컬러로 된 사진으로 작품들을 나란히 보면서 비교할 수 있어서 실감하기 어렵지만, 컬러 사진이 없었던 당시에 연구자들은 저마다 기억에 의지하여 작품을 비교해야 했다. 한쪽 그림 앞에서 다른 그림을 떠올리는 식이었다.



좌: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다름슈타트의 성모자(Darmstädter Madonna)> 
1526 나무에 유채 146.5×102cm 
우: 바르톨로메우스 자르부르흐(Bartholomaus Sarburgh)  
<드레스덴의 성모자(Dresden Madonna)> 
1635-1637 패널에 유채 159×103cm



판 메이헤런의 위작

이처럼 복제를 통해 만든 위작은 원작의 존재가 알려지면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위작을 제작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한 예술가의 스타일을 흉내 내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그 예술가의 여러 작품에서 몇몇 요소를 추출하여 재조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도라도 하려면 위작 제작자는 자기가 따라 하려는 예술가의 스타일에 정통해야 하고 자기 나름의 해석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든 위작을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라며,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 이번에 새로 발견되었다며 내세우는 것이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1665)로 널리 알려진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이름을 팔아 위작을 만들었던 네덜란드 화가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이 대표적인 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  캔버스에 유채 44.5×39cm


페르메이르는 일상 속의 공간에 자리 잡은 여성의 미묘한 모습을 섬세하게 그린 그림으로 이름이 높지만 화업 초기에는 종교적인 주제를 그리기도 했다. 그가 성경 속 이야기를 주제로 그린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1654-1655)는 1901년에야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때 이 그림을 감정하고 발견한 네덜란드의 미술사가 아브라함 브레디위스(Abraham Bredius)는 페르메이르가 성경을 주제로 삼아 그린 그림이 이 밖에도 더 있을 것이라고 했다.


판 메이헤런은 이 지점을 겨냥했다. 그는 페르메이르와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 기법을 연구했고, 17세기에 무명 화가가 그린 그림을 사 모아서는 캔버스에 입혀졌던 물감을 벗겨 내고는 그 위에 오래된 안료로 그림을 다시 그렸다. 오래된 그림처럼 보이도록 갖가지 수법을 구사해서는 위작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엠마오의 그리스도와 제자들(Christ and the Disciples at Emmaus)>을 1937년에 내놓았고 1941년에는 <그리스도의 머리(Head of Christ)>와 <최후의 만찬(Last Supper)>을 내놓았다. 이들 위작은 모두 진품으로 인정받았고, 네덜란드 미술계는 페르메이르의 종교화가 새로 발견되었다며 찬사를 보냈다. 판 메이헤런은 거액을 손에 넣었고, 집과 토지를 사들이며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54-1655 캔버스에 유채 160×142cm



1945년 5월 17일, 유럽을 휩쓸었던 비참한 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아우스제(Aussee) 근처 암염갱(巖鹽坑)으로 진입해서 그곳에서 대량의 미술품을 찾아냈다. 나치 정권의 제2인자였던 괴링 원수가 전쟁 중에 긁어모았던 미술품이었다. 이들 중에서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Christ and the Adulteress)>(1942)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 한 점이 주의를 끌었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는 ‘I.V.Meer’라는 서명이 또렷했다.

이 작품의 경로를 추적한 결과 판 메이헤런이 독일인 은행가를 통해 괴링에게 판매했다는 게 드러났다. 판 메이헤런은 네덜란드의 중요한 유산을 적국에 팔아넘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판 메이헤런은 괴링에게 넘어간 그림이 실은 페르메이르의 원작이 아니고 자기가 페르메이르를 흉내 내어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1930년대 후반부터 페르메이르의 그림이라며 네덜란드에 새로이 나타난 그림은 전부 자신이 그린 거라고 했다.

다들 판 메이헤런이 대독협력죄에서 빠져나가려고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결국 재판부는 판 메이헤런에게 페르메이르처럼 그림을 한 점 그려 보라고 했다. 판 메이헤런은 감시를 받으면서 <학자들 사이에 앉은 그리스도(Jesus among the Doctors)>라는 그림을 그려냈다. 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판 메이헤런의 입지도 확 달라졌다. 국가의 보물을 적국에 팔아넘긴 배신자에서 나치의 괴링을 속인 영웅으로 바뀌었다.



1945년 3개월 동안 가택 연금을 당한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이 경찰과 배심원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마지막 위작 <학자들 사이에 앉은 그리스도
(Jesus among the Doctors)>를 그리고 있다.  
이미지 제공: GaHetNa (Nationaal Archief NL)
사진: Koos Raucamp



공수교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위작 사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앞서 위작을 구입했던 수집가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위작을 진품이라고 감정했던 전문가들도 사건의 진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조각가 조반니 바스티아니니(Giovanni Bastinanini)가 만든 위작이 루브르 박물관과 파리 미술계를 시끄럽게 했는데, 이때도 바스티아니니 자신은 위작을 만들었다고 했고 프랑스 미술계의 권위자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다.

20세기 초반에 유럽과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들을 골탕 먹였던 알체오 도세나(Alceo Dossena)의 경우에도 그의 위작을 사들인 이들은 한사코 위작이라는 걸 부정했다. 바스티아니니와 도세나 둘 다 솜씨가 대단히 빼어났기 때문에 이들이 만든 위작은 곧바로 들통이 나지는 않았고, 위작을 유통한 사람이나 위작 제작자 본인이 고백하고서야 비로소 전말이 드러난 경우이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양귀비 들판(Poppy Field)> 
1873 캔버스에 유채 50×65cm



바스티아니니와 도세나 둘 다 자신들이 위작을 만들었음을 인정(?)받기 위해 애써야 했다. 바스티아니니는 자신이 만든 위작을 놓고 이를 믿지 않는 프랑스의 조각가와 신문 지상에서 논쟁을 벌였고, 도세나는 영화 카메라 앞에서 직접 위작을 만들어 보였다. 앞서 본 것처럼 판 메이헤런은 사법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위작을 만들었다.

1920-1930년대에 걸쳐 독일과 네덜란드 미술계를 뒤흔들었던 ‘오토 바커’ 사건의 경우, 베를린의 미술상이었던 오토 바커(Otto Wacker)가 만들어 팔았던 가짜 반 고흐 그림을 둘러싸고 전문가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전문가들은 수집가와의 친분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 때문에 사법 당국은 그림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었다. 결국 바커 사건의 재판에서 처음으로 미술품에 대한 과학 감정이 증거로 채택되었고, 이 뒤로 미술품의 진위를 둘러싼 공방은 미술품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만 매듭지어질 수 있게 되었다.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Christ and the Adulteress)>
1942  캔버스에 유채 100×90cm



큰소리치는 위작자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활동한 위작 제작자들에게서는 이전과는 다른 특색이 엿보인다. 매체가 발달하고 이들 위작자가 매체를 통해 발언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스스로가 위작을 만들어 유통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판 메이헤런은 자신이 당시 네덜란드의 주류 미술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이를 복수하기 위해 위작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심판하는 이들을 향한 감정적 호소였지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는 아니었다. 반면 1950년대 이후로 정체가 드러난 톰 키팅(Tom Keating), 엘미르 드 호리(Elmyr de Hory), 에릭 헵번 같은 위작 제작자들은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무려 121명의 옛 미술가를 흉내 내어 2,000여 점의 위작을 만들었던 톰 키팅은, 자신이 위작을 만든 건 가난한 미술가들을 착취해 온 탐욕스러운 미술상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오래된 그림을 수복하는 일을 하면서 회화의 재료를 잘 알았던 키팅은 자신이 만든 위작이 언젠가는 들통이 나도록 그 안에 갖가지 장치를 숨겨두었다.

17세기에 활동한 화가의 위작을 만들 때는 18세기의 종이에 그리고, 19세기 화가의 위작은 20세기의 종이에 그리는 식으로 재료의 시대를 어긋나게 하거나, 유화로 위작을 만들면서 화면 아래층에 흰 물감으로 글씨를 써 두어서 X-선으로 비추면 드러나게 하는 식이었다. 키팅의 정체가 드러나자 영국 미술계는 혼란에 빠졌지만 정작 키팅 본인은 건강 문제로 처벌을 면했고, 오히려 TV에 출연해서 옛 그림에 대해 강의하며 유명세를 누렸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무대 위의 무희(Dancer on Stage)>
1880 캔버스에 유채 38×27cm



거짓과 진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위작을 만들어 팔아댔던 엘미르 드 호리는 인생 자체가 거짓과 속임수로 점철된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귀족 출신임을 자처하며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라울 뒤피(Raoul Dufy)등을 흉내 내어 위작을 만들었던 드 호리는 유명한 영화감독 오손 웰스(Orson Welles)가 1974년에 만든 영화 <거짓과 진실(F for Fake)>에 실명으로 등장했다. 이 영화에서 그가 “가짜 작품이라도 미술관에 얼마 동안 걸려 있으면, 진짜 작품이 된다”라거나 “모딜리아니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남긴 작품이 적으니까, 내가 몇 점 보탠대서 나쁠 건 없다”라고 한 말은 두고두고 회자 될 정도이다.

사실 영화 <거짓과 진실>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로서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의 문제에 천착했던 웰스의 다소 유희적인 프로젝트였다. 이 영화에서 드 호리는 카메라 앞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초상화를 그려서는 ‘오손 웰스’라고 서명했다. 웰스도 드 호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탁월한 거짓말쟁이라고 인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굳이 미켈란젤로를 그린 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예술가 열전(Le Vita De' Piu Eccellenti Architetti, Pittori, et scultori)』(1550)에 실린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 책에는 미켈란젤로가 스무 살 무렵에 대리석을 깎아 <잠자는 큐피드(Sleeping Cupid)>(1496)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 조각상을 친구인 발다사레 델 밀라네세(Baldassare del Milanese)가 땅에 파묻었다 꺼내서는 고대의 조각품인 것처럼 속여서 추기경 라파엘로 리아리오(Raphaelo Riario)에게 팔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막을 알게 된 추기경은 발다사레에게서 돈을 돌려받고는 이 조각품을 내주었다.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이라면 훗날 값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귀한 것이 되었을 텐데 추기경은 이를 걷어차 버린 셈이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며 추기경을 몰아세웠다.

“사람들은 그 완벽한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추기경을 조소하고 심지어 비난했다. 사람들이 웃든 말든, 옛날에 만들었든 당대에 만들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일은 미켈란젤로의 명성을 높였을 뿐이다.” 바사리에게 위작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예술가도 위작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뒷날의 위작자들은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지베르니의 숲속에서:
이젤 앞의 블랑쉬와 독서 중인 수잔(In the Woods at Giverny:
Blanche Hoschedé at Her Easel with Suzanne Hoschedé Reading)>
1887  캔버스에 유채 91.4×97.8 cm



안목의 문제

비교적 최근까지 영국 미술계와 그 주변을 흔들어댔던 위작자 에릭 헵번은 위작자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가 미술계를 공격하는 언어는 비분강개형의 키팅이나 몰염치형의 드 호리와도 달랐다. 영국의 주류 미술계에서 일찍이 입지를 확립하는 듯하다가 좌절을 겪은 헵번은, 이탈리아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풍의 위작을 만들어서 영국 미술시장에 풀어놓았다.

마침내 몇몇 감정가들이 헵번의 꼬리를 밟자 정체를 드러낸 헵번은 1991년에 내놓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1,000여 점의 위작을 유통했지만 단 한 차례를 빼고는 발각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솜씨로 화상과 전문가들을 연달아 속였는지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고, 화상은 탐욕으로 뭉친 인간들이며 감정 전문가들은 실제로는 미술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무능한 이들이라고 공격했다.

이 글 맨 앞에서 언급한 소묘들이 실린 것도 바로 그 자서전이다. 누구나 헵번이 이끄는 대로 이 두 점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한쪽은 눈앞의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고 다른 한쪽은 그런 그림을 베낀 것이니까, 이 차이에 주목한다면, 코로나 헵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대도 답을 구할 수 있다. 코로의 소묘에서는 한편으로 눈앞의 인물을 관찰하고 그러면서 관찰한 것을 재빨리 화면에 옮기느라 분주한 손길에서 생겨나는 긴장이 보인다.

반면 헵번의 선은 대상을 좇는 게 아니라 코로가 이미 그은 선을 좇는다. 코로가 이미 그은 선은 헵번의 입장에서는 종이 위의 좌표일 뿐이었다. 코로의 소묘에서 견결하게 자리 잡은 선들이 헵번의 소묘에서는 흐물흐물하게 풀어헤쳐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의 머리칼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코로의 선은 음영을 거침없이 가르지만, 헵번의 선은 목적의식을 잃고서는 모호한 중간 톤을 이루며 떠돈다.

헵번은 그 책에서 두 소묘 중 어느 쪽이 진품이고 어느 쪽이 위작인지 곧바로 답을 알려주었다(이 원고에서는 왼쪽이 진품이고 오른쪽이 위작이다). “자, 답을 확인하고 나면 이제 내가 모사한 그림이 얼마나 어설픈지, 내 구성이 얼마나 어긋나고 있는지, 내 묘사가 얼마나 서툰지 보일 것이고, 미처 보지 못했던 몇몇 끔찍스러운 실수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 페이지 아래쪽에 붙여 놓은 답이 실은 틀린 거라고 한다면?”

헵번은 답을 반대로 달아 두었다. 독자들은 ‘정답은 이 페이지의 아랫부분에 있다’라는 글을 읽으면 곧바로 눈을 아래로 내려 정답을 확인하고, 다시 올라와서는 정답에 자신의 판단을 꿰맞추면서 그림을 보게 된다. 헵번은 그 점을 역이용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에서도 헵번의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답은 반대로 되어 있다(오른쪽이 진품이고 왼쪽이 위작이다). 만약 앞서 필자가 코로와 헵번의 소묘를 비교한 내용을 읽으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독자라면, 헵번 같은 위작자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작은 미술시장에 내린 저주이고 이제는 과학 감정의 시대가 되었지만, 직관과 안목은 여전히 예술을 접하고 판단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걸, 여러 위작 제작자들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PA


글쓴이 이연식은 미술사를 입체적으로 탐구하면서 예술의 정형성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다양한 저술, 번역,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양 미술사』, 『죽음을 그리다』, 『드가』, 『뒷모습』, 『미술품 속 모작과 위작 이야기』,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등을 썼다.



톰 키팅(Tom Keating)




Special Feature No.3
도난 미술품 및 위작 거래에 대한 법제
이유경 미국변호사


2000년 이후 위작 및 도난 미술품은 한국 미술시장 및 미술행정 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2000년을 전후하여 굵직한 위작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였고, 그 처리 결과에 석연치 않은 지점들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미술행정계는 미술시장에서 위작품과 도난품을 근절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미술품의 불법적 거래에 대하여 위작과 도난 미술품을 하나로 묶어 논의하는 경향이 있으나, 두 영역은 구분되어 다룰 필요가 있다. 위작의 경우 대부분 형사사건으로 국내법의 적용을 받는 반면, 도난 미술품의 소유권 회복의 경우에는 민사사건으로 국제법과 각국의 복잡한 법적 문제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미술계는 위작을 둘러싼 논의와 법적 공방으로 꾸준히 고통받아 왔는데, 대표적인 관련 작가로는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가 있다. 2007년 검찰은 이중섭과 박수근의 미발표작 2,800여 점을 보관하고 있던 당시 한국고서연구회 명예회장 김용수를 사기 혐의로 기소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17년, 대법원은 그가 소장한 모든 작품이 위작이라는 하급심의 판결을 유지하면서 피고인이 위작을 판매한 행위가 사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한편 1990년 초반부터 위작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천경자의 <미인도>사건은 작가의 강력한 위작 주장에도 불구하고 2017년 검찰의 항고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항고가 기각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법원의 재판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였다. 이후 유족들은 검찰을 상대로 사자명예훼손을 이유로 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나, 결국 2003년 대법원은 <미인도>의 진위 여부가 아닌 고인이 된 천경자의 명예훼손만을 판단 대상으로 하여 유족의 패소로 결론지었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
(Rue Saint-Honoré in the Afternoon, Effect of Rain)> 
1897 캔버스에 유채 81×65cm



I. 위작 거래에 대한 법적 제재


1. 미술품 유통법안의 좌초와 미술진흥법 제정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는 허위감정에 의한 미술시장 불안 해소를 위하여 화랑업·미술품 경매업·미술품 감정업의 등록제, 기타 미술품 판매업의 신고제 및 위작을 유통시킨 자 및 허위 감정한 자에 대한 처벌을 골자로 하는 「미술품의 유통 및 감정에 관한 법률안(이하 미술품 유통법안)」을 제안하였다. 법안에 따르면 미술품 판매업자들은 판매된 미술품의 내역을 관리할 의무를 지고, 감정업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이 감정한 작품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또한 위작을 판매한 자의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고, 허위 보증서를 발급한 판매업자나 허위 감정서를 발급한 감정업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등 엄격한 처벌 규정을 두었다. 이후 정부에서 미술품 감정연구센터를 지정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위작 유통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민사상 손해배상 규정으로 변경하는 수정법안이 제출되었으나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 처리되었다. 당시 미술품 유통법안에 대하여, 위작 유통 시 유통업자가 고의·과실 없음을 직접 증명하도록 하는 규정이 추가되어야 하고, 국내 미술시장 성장을 위하여 규제보다는 활성화 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제21대 국회는 2023년 건전한 미술시장 조성을 취지로 하는 「미술진흥법」을 의결하였다. 미술진흥법은 과거 미술품 유통법안과 달리 위작 유통 통제보다는 미술시장 건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위작 유통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다만 화랑, 경매업, 감정업 등에 대하여 신고 의무를 부과하고, 미술품 유통을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제한하는 등 간접적으로 미술시장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미술품 유통법안에 대하여 규제 위주의 법안이라는 이전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그러나 구매자의 진품 증명서 요구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위반하는 미술품 유통업자에 대한 제재 규정을 두지 않았다는 점과 감정업에 대한 윤리규제 방안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작 유통과 관련해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한편 미국 뉴욕주의 「예술문화법(Arts and Cultural Affairs Law)」 제13조 이하는 진품 증명서 제공을 의무화하고 고의로 허위 사실을 기재한 경우 손해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그 행위 자체를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결국 위작이 유통되는 경우 특별법이 아닌 민법과 형법이 적용된다. 위작을 판매한 판매상은 민법 제580조에 따라 하자담보책임을 부담하게 되어 매도인이 위작 여부를 인지했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매수인은 계약을 해제할 수 있게 된다. 다만 매수인은 이러한 계약해제권을 위작임을 안 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행사해야 한다. 형법상 위작임을 알고 판매한 자에게는 사기죄가 인정될 수 있고, 위조된 작가의 서명이 있는 작품을 판매한 점에서 위조사서명행사죄도 성립될 수 있다. 다만 형사사건에서는 민사사건에서보다 높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고 있어, 안목 감정뿐만 아니라 과학감정을 통하여 위작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유죄가 인정될 수 있다.



피터 도이그(Peter Doig)는 ‘Pete Doige 76’이라고 서명된 
그림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nytimes.com/2023/01/17/arts/design/peter-doig-painter-lawsuit.html 
사진: Whitten Sabbatini



2. 법원에 의한 진품 감정의 허와 실

현재 국내에서 대부분의 위작 사건은 형사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판사는 미술품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 증언을 통하여 진품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문제는 중립적인 전문가를 섭외하는 일이 쉽지 않고 여러 전문가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위작 여부를 확률적으로만 제시하는 경우 결국 감정 결과의 해석이 법원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중섭 화백 사건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사건의 대상이 된 그림의 물감에서 이중섭 화백의 사후 개발된 산화티탄피복운모가 검출되었는지 여부였다. 감정 결과 티타늄이 나타나지 않거나 티타늄이 물감에서 발견된 것인지 아니면 종이에서 발견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법원은 이러한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산화티탄피복운모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위작으로 결론지었다.

미술품 감정은 해당 작가에 대한 고도의 전문성과 도상 분석 및 재료분석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하는 작업으로, 법원에게 최종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갖는다. 위작으로 판결되는 경우 그 작품들은 결국 폐기처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법원은 위조범 및 위조 과정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 감정 결과만 가지고 위작 여부를 판결하는 데 소극적이다. 법원은 미술품 감정을 위한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고, 진위는 결국 작품의 시장성(marketability)의 문제로 미술시장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다.

전문가 증언과 관련하여 또 다른 문제는 작가의 주장을 채택할 수 있는지다. 생존한 작가의 위작 사건에서 작가가 직접 사실 여부에 대하여 발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사건에서 우리나라와 미국의 법원은 각각 다른 태도를 보였다. 자신이 피터 도이그(Peter Doig)의 초창기 그림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는 소장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미국 법원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작가의 주장을 주요 증거로 채택한 바 있다.*

반면 천경자 화백 사건에서 법원은 작가가 자신의 그림임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요 증거로 채택하는 대신 소장 이력 등에 더 무게를 두어 판결을 내렸다. 작가 또한 이해관계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현재 미술품 감정 및 작가 주장의 증명력에 대한 법리가 부재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가축 상인(The Cattle Dealer)> 
1912 캔버스에 유채 97.1×202.5cm



II. 도난 미술품에 대한 법적 제재

도난 미술품의 경우, 최근 고려시대 후반기에 도난당하여 일본 대마도 사찰에서 보관 중이던 서산 부석사 불상을 재탈취한 사건이 국내 법원에서 다루어진 바 있으나,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큰 문제로 제기되곤 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이후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나치에 의해 약탈당한 미술품 또는 전쟁 중 혼란을 틈타 불법 반출된 문화재 등에 대하여 국제규범을 제정하여 소유권 회복 및 불법 반출 미술품에 대한 거래 금지 조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실제 소유권 회복이나 부당이득 반환을 청구하고자 하는 경우, 각국의 국내법 적용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1970년 유네스코 협약은 회원국들에 불법 반출 문화재 반입을 금지하고 이에 대한 행정적, 형사적 제재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도난품 등에 대하여 선의취득을 인정하는 국가와 이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의 경우에 각국의 사법적 충돌을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가졌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1998년 불법 반출된 문화재의 선의취득을 인정하지 않고 반환을 의무화하는 유니드로와(UNIDROIT) 협약이 발효되었다.

유니드로와 협약은 문화재 발굴이 이루어진 문화재 출처국에게 소유권과 반환청구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 영국과 같이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물론 우리나라도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사건에서 반환소송 시 어느 나라의 법률을 준거법으로 할지는 여전히 각국의 법제와 판례에 따라 결정된다. 준거법 선택의 문제는 선의취득 인정 여부에 있어서 특히 문제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타국으로부터 반환청구를 받은 바 없고, 우리의 문화재 반환을 외국에 청구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반환청구가 이루어지는 미국 법원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한다.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2015)로 유명해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Portrait of Adele Bloch Bauer I)>(1903-1907) 도난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외국주권면제법(FISA)에 따라 도난 미술품과 같은 국제법 위반 사건의 경우, 미국과 ‘상업적 관계’가 있는 외국의 재산에 대하여 미국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이 미국에서 소장품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미술관을 광고한다는 이유로 ‘상업적 관계’를 인정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치 약탈 미술품 반환소송이 줄지어 미국 법원에 제기되었다. 현재 이 그림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건너편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 New York)에서 전시되고 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반환청구권자가 미국 국적자였기 때문에 소송계속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도난 미술품 반환을 청구하는 경우, 미국에 해당 미술품이 위치하고 있는 경우여야만 미국 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아델르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3-1907 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40×140cm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탈출하기 위하여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의 풍경화를 포기해야 했던 미국인 유태인 릴리 카시러(Lilly Cassirer)의 손자는 스페인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Museo Thyssen-Bornemisza)이 그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원에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항소법원은 연방 법리에 따라 미술품이 위치한 장소의 법이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치에 의해 약탈당한 미술품임을 알지 못한 미술관에게 선의취득을 인정하는 스페인 법이 적용된다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불법 반출된 미술품은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에 외국주권면제법에 따른 면책을 받지 못하므로 연방 법리가 아닌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준거법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항소심 판결을 파기환송 하였다. 이 판결로 인하여 도난당한 작품에 대한 선의취득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법이 적용되어 카시러 가족의 소유권이 인정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 항소법원은 주 대법원에 준거법에 관한 결정을 구하였으나 주 대법원은 답변을 거부하였다. 이에 항소법원은 2024년 1월 캘리포니아 주법상 ‘공익 형량’ 법리를 적용하여 캘리포니아 주보다 스페인의 이익이 더 크게 영향을 받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스페인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판결했다. 나치 약탈 문화재 등 자국민이 외국에 대한 반환청구에 대한 최근 미국 법원의 소극적 경향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법원에서 미국법에 따라 반환소송이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원소유자의 소유권이 항상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공소시효라는 문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절도에 대한 공소시효는 3년으로, 공소시효가 지난 다음에는 절도를 이유로 한 반환청구나 부당이득 반환청구가 제한된다. 미국 대부분 주에서 ‘discovery rule’에 따라 3년의 기산점을 도난 물품의 소재지와 소유자를 알거나 알 수 있을 때로 보고 있는데 반하여, 뉴욕주의 경우 ‘demand and refusal rule’에 따라 원소유자가 현 소유자에 대하여 반환 요구를 한 후 현 소유자가 이를 거부한 때를 기산점으로 본다.

이러한 뉴욕주의 ‘demand and refusal rule’은 1991년 뉴욕 항소법원에 의해 확립되었다. 1960년대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 직원이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가축 상인(Cattel Dealer)>(1912)을 절취하여 갤러리에 판매하였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술관 보안의 허점이 드러날까 우려하여 도난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현 소유자인 레이첼 루벨(Rachel Lubell)은 위 갤러리에서 1967년에 작품을 구매하여 소장하고 있었고, 구겐하임 미술관은 1985년이 되어서야 이를 발견하고 반환을 요구하였다. 루벨은 구겐하임 미술관이 도난 직후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공소시효가 완성된 것을 이유로 반환을 거부하였다. 뉴욕 제1심 법원은 이러한 루벨의 주장을 인용하였으나, 항소법원은 피해자에게 도난품을 수배할 의무를 부과할 경우 약탈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유로 공소시효의 기산점을 구겐하임 미술관이 반환을 요구하고 루벨이 이를 거부한 때로 삼아 구겐하임 미술관의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불법 반출된 국외 소재 문화재 반환에 대한 요구가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2023년 서산 부석사 불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나타나듯이 우리 법은 문화재와 일반동산을 구분하여 준거법을 정하고 있지 않다. 문화재의 경우에도 일반동산과 마찬가지로 국제사법상 물건의 소재지법에 따라 소유권 유무가 결정된다. 따라서 일본과 같이 점유취득시효 제도가 인정되는 경우 법리상 일본의 소유권을 부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 유니드로와 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이를 근거로 한 반환청구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재나 중요 미술품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고려하여 일반 물건과 달리 발굴지의 법을 적용하는 기원국법주의가 반영된 입법 고려할 필요가 있다.PA


글쓴이 이유경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학과에서 문화재보호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로스쿨(Northwestern University School of Law)에서 수학 후 현재 뉴욕 미술법 전문 로펌 Danziger, Danziger & Muro, LLP에서 미국변호사로 근무하며 아트 컨설턴트로서 바스키아, 뭉크 등의 전시를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각주]
* Graham Bowley, Painter Awarded $2.5 Million in Dispute Over Work He Denied, The New York Times, 202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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