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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13, Jun 2024

패션과 예술

Fashion & Art

●기획 · 진행 김미혜 수석기자, 김성연 기자

'Forever Valentino' 'A Palazzo' © Valentino 이미지 제공: Valentino 사진: Agostino Osio / Alto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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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다나 미술 칼럼니스트, 김성연 기자,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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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예술은 ‘미(美)’에 원천을 둔 채 시대와 교감해 왔다. 여전히 아니 어쩌면 더욱 활발히 서로를 원하고 있는 지금, 이번 특집은 나란히 문명을 지나온 둘의 궤적을 좇는다. 먼저 예술에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글로벌 패션 기업이 펼쳐 온 아트 마케팅의 과거와 현재를 전한다. 확장된 럭셔리의 의미와 갈수록 다각도로 이루어지는 패션 브랜드의 예술적 시도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 시대의 기록으로서 공존해 온 패션과 예술의 조우를 톺는다. 두 영역의 개념적 관계와 이들이 나눈 시공간, 순간을 다양한 사례로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끝으론 패션과 예술이 각자 지닌 기능과 아우라라는 효용을 교환하며 미술관에서 만나기까지, 여러 물음에 기반해 이 과정을 면밀히 알아본다. 서로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은 패션과 예술의 이상적인 동행을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달의 조각을 태양의 실로 이어 붙이는 섬세한 마법사(qui fait tenir, magicien subtil, de la lune en morceaux sur du soleil en fil).” 프랑스 예술가 장-콕토(Jean-Cocteau)가 까르띠에(Cartier)를 비유했던 문장처럼, 서로의 달과 태양이 되어 오늘도 시대와 호흡하는 패션과 예술의 숨결을 느껴볼 시간이다.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공개된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의  
구찌 크루즈 2025(Gucci Cruise 2025) 컬렉션 © Gucci




Special Feature 1
예술과 패션의 동행, 그 기나긴 여정_황다나

Special Feature 2
패션과 예술: 시대의 기분_김성연 

Special Feature 3
미술관으로 들어간 패션_박찬용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 
<Flower Parent and Child> Ⓒ 2020 
Takashi Murakami / 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Photo: KOZO TAKAYAMA Collaboration 
between Takashi Murakami and Louis Vuitton




Special Feature No.1
예술과 패션의 동행, 그 기나긴 여정
● 황다나 미술 칼럼니스트


하루가 다르게 극변하는 현대 소비사회는 경쟁을 부추긴다. 단순 물질 소비보다 부가가치, 서비스, 나아가 경험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태세를 갖춘 소비자가 전 세계적으로 많아지면서, 정보 과부하라는 바다와 선택 피로의 파도 사이를 너울거리며 항해하는 글로벌 패션 기업은 고객에게 다다르고 인상을 남기기 위한 전략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아트 마케팅을 다방면에서 펼치고 있다.


패션과 예술, 세기를 관통한 영감의 교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패션을 일컬어 “생활에서 드러나는 멋과 사회 교류로 예술을 실현하려는 시도(attempt to realize art in living forms and social intercourse)”라고 정의했다. 근대 철학의 선두에서 과학혁명을 이끈 이의 이 같은 발언은 예술과 디자인, 건축·기술이 융합되는 크로스오버 문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공명한다.

예술과 패션은 형태, 패턴, 문양과 질감, 컬러 팔레트를 활용한 시각적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시대를 초월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라이프 스타일, 대중문화 발전에도 기여해 왔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과 패션이 인본주의와 고전 문화 부흥을 꾀했다면, 여성의 참정권 획득 등으로 사회적 역할이 급변한 20세기 초에는 새로운 이념을 탐구하는 실험정신을 중시하는 당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은 아방가르드 패션과 예술로 이어졌다.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Hermès In The Making)>에서
 실크 프린팅하는 장인 사진: 신경섭



패션과 텍스타일을 사랑했던 프랑스 예술가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의 대담한 색상과 생동감 넘치는 패턴은 동시대 활동하던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폴 푸아레(Paul Poiret) 같은 패션 디자이너는 물론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 등 후세 디자이너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환상적인 모티프와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의 아방가르드 디자인이 한데 만나 랍스터 프린트의 이브닝 드레스가 세상에 선보여졌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았던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이하 YSL)은 자신의 이름을 건 메종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Blue and Yellow)>(1930)을 연상시키는 칵테일 드레스를 디자인하며 추상미술의 선구 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명 ‘프레타 포르테(prêt-à-porter/ready-to-wear)’로 불리는 YSL 기성복 출시 두 해 전인 1965년에 발표해 패션과 예술의 조우가 빚은 새로운 아이콘의 탄생을 알린 드레스는 단순한 컷, 기하학적인 선, 대담한 색상으로 컬렉션에 모던한 느낌을 부여하며 화제 면에서도,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Hermès In The Making)>
에서 실크 프린팅하는 장인 사진: 신경섭




럭셔리 패션: ‘꿈의 실현’을 선사하다

예술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던 패션이 본격적으로 ‘예술을 실현’하려는 시도를 공공연히 한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소비의 문화인류학과 밀접히 연결된다. 패션과 럭셔리는 더 이상 부유층 기반의 특정 ‘유형’만을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초고액순자산(Ultra High Net Worth, UHNW) 고객의 구매행동이 완벽을 기하는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품질, 오랜 세월 대대로 이어온 가치에 의해 여전히 좌우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국경과 문화적 경계를 넘어 럭셔리는 소수의 “특수계층이 누리는 일상(the ordinary for extraordinary people)”의 경계를 벗어나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순간(the extraordinary for ordinary people)”으로 노선을 전환해 신흥 시장으로 확장해 나갔고, 이는 고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디자이너가 예술 작품에서 감화되어, 특정 색상이나 패턴을 차용한 것이 20세기 초중반 패션·예술 협업의 주를 이뤘다면, 21세기 협업은 창의적인 제품 디자인부터 매장 내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보다 친밀하면서도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세계를 무대로 뻗어 나가려는 다국적 기업에게 국경 없는 언어인 예술은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수단으로 거듭났다.

1980년대 들어서는 럭셔리 그룹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유서 깊은 하우스를 인수한 기업가들은 수익 개선에 나섰고 그룹에 합류하지 못한 일부 오트 쿠튀르 메종은 서서히 광택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Louis Vuitton Moët Hennessy, 이하 LVMH) 그룹의 CEO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는 1999년 12월, 새천년을 앞두고 발간된 『WWD』와의 인터뷰에서 “창의성을 수익성으로 전환시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What I like is the idea of transforming creativity into profitability)”고 밝혔다. 이는 다가올 21세기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고, 세계 최고 부자 대열에 등극한 그의 이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건용이 작업한 디올 레이디 아트 컬렉션 
8번째 에디션 © Christian Dior



예술과 비즈니스 세계의 교차점은 이 같은 철학으로 제품의 위상을 높이려는 럭셔리 그룹의 야심 찬 노력과도 연관이 깊다. 예술과의 연계로 한층 고상하고 익스클루시브(exclusive)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혁신을 좇았다. 세계화된 사회, 글로벌 경제의 급속한 변화가 예술과 접목한 마케팅의 효과를 드높였다. 여기에 인터넷 보급만큼이나 큰 파급력을 지닌 소셜미디어의 도래도 한몫 했다. 예술이 깃든 콘텐츠를 다채로운 채널에 소개해 고객과 브랜드를 더욱 긴밀히 연계시키는 아트 마케팅 기법은 고객의 감성에 접근하는 감각적인 방법으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현대사회에서 문화 없이 경제를 생각할 수 없다”는 프랑스 문명평론가 기 소르망(Guy Sorman)의 주장을 뒷받침이나 하듯 아트 마케팅을 일회성 문화예술 후원이 아닌 브랜드 차별화를 위한 투자로 여기는 기업도 차차 늘어났다. 특히 일상 사물을 오브제로 적극 활용하는 현대미술의 대두와 더불어 예술과 비즈니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더욱 빈번하고 정교해졌으며,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ictoria and Albert Museum)과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에서 각각 선보여진 루이 비통 아트 컬래버레이션 핸드백은 런던에서는 디자인, 뉴욕에서는 예술 작품으로 전시되며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마케팅의 행보에 유의미한 질문을 던졌다.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가 협업한
  <Woman’s Dinner Dress> 1937 Printed silk organza, 
synthetic horsehair 132.1×55.9cm  Courtesy
 Philadelphia Museum of Art Gift of Mme
 Elsa Schiaparelli, 1969



아트 마케팅, 그 이면에 숨은 전략

아트 마케팅은 단순히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나아가 미디어 포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바꿔 놓았다. 시장 확장으로 인해 더 이상 럭셔리는 진정한 “독점” 제품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게 되었다.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늘 더욱 높은 곳을 추구하는 럭셔리의 본질은 브랜드 가치와 더불어 마진도 높게 유지한다는 양면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 후원부터 아트 마케팅에 이르는 예술과의 협업을 추구하게 되었다. 아트 마케팅은 전 세계 소비자에게 문화를 넘어 기업의 가치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 이르렀다.

대표적으로 럭셔리 시장 경쟁이 보다 치열해진 21세기 진입을 앞두고 일찌감치 1990년대부터 예술과의 협업을 이끌며, 트렌드를 주도해 온 루이 비통의 사례를 살펴보자. 예술가의 창조성을 전적으로 지원할 뿐 아니라, 고객과의 소통에 감성적 요소를 불어넣으려는 경영진의 열망이 뒷받침된 루이 비통 아트 마케팅 돌풍은 1997년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의 영입과 함께 시작됐다. 뉴욕 기반의 젊고 트렌디한 아티스틱 디렉터는 하우스 첫 패션쇼를 이끌며, 가죽제품 제조사에 머물던 여행 예술의 선구자를 글로벌 럭셔리 패션 브랜드로 단숨에 변신시켰다. 이어 출시된 시계와 보석을 비롯한 제품 카테고리 확장으로 시장점유율을 넓히며 질적 성장을 견인하고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레이디 디올 셀레브레이션>
전시 전경 2023 디올 성수
© Christian Dior 사진: 신경섭



제이콥스가 가져온 혁신의 새바람은 잘 만들어졌지만 오랫동안 변화가 없어 ‘지루하던’ 가죽제품에도 어김없이 들이닥쳤다. 그는 스테판 스프라우스(Stephen Sprouse),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에 이르는 현대미술가와 협업해 클래식한 모노그램 로고를 재해석하고 18세기 고객 맞춤형 스페셜 오더 제품을 뒤잇는 현대식 한정판 개념을 정착시켰다. 훗날 제이콥스는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 디자인 대학(Central Saint Martins -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특강 중 루이 비통의 상징과도 같은 로고 위 ‘그라피티(graffiti)’라는 변주를 주는 디자인이 일부 경영진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고 실토했다.

이어서 “수익이 3억 달러(한화 약 4,085억 1,000만 원)를 넘기자 그들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다”고 덧붙여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제이콥스는 예술 분야와의 성공적인 협업에 큰 공헌을 했지만, 이러한 성과는 비단 개인 능력과 자질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의 창의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계획과 추진력 뒤에는 최고 수준의 품질 기준에 대한 집착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혁신을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하던 이브 까셀(Yves Carcelle) 옛 브랜드 CEO를 필두로 한 기업 리더십의 대담하고도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풍부한 전통과 문화유산이 뒷받침되었음이 자명하다. 루이 비통 역사가 낳은 산물인 모노그램 로고가 없었다면 제이콥스가 가방에 그 어떤 모던한 형식의 변형을 불어넣었더라도 우리가 기억하는 선풍적인 대성공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챕터2 전경 2024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좌: 네크리스, 까르띠에 2017 
개인 소장품; 우: 네크리스, 까르띠에 런던 특별 주문 제작 
1932 까르띠에 소장품 © Cartier 사진: 오노 유지(Yuji Ono)



변덕스러운 고객을 매년 유치하기 어려운,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예술을 통해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는 지름길과도 같다. 예술과의 협업에는 대대적인 언론 노출이 따랐고 끊임없는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이미 높은 브랜드 인지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대기자 명단은 마침내 가방을 손에 넣은 VIP들을 무척 기쁘게 할 만큼 길었고, 매장 직원은 한정 제품을 위해 매장을 방문한 수많은 고객을 응대해야 했으며, 이들은 종종 다른 제품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한정판으로 출시되는 아트 컬래버레이션 컬렉션을 통해 브랜드는 가격 인상을 정당화하며, 이를 고성장의 발판이자 스스로의 지위를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멀티컬러 스피디(Multicolore Speedy) 가방의 출시 당시 가격은 기존 모노그램 캔버스 동일 디자인보다 3배 이상 높았다. 같은 디자인이라도 로고에 새겨진 93가지에 달하는 색상이 캔버스에 스크린 프린트되어 예술적 부가가치가 더해진 가방을 구매하며, 가격 격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방문객은 결코 많지 않았다.

이로써 브랜드는 한정판의 고가 포지셔닝으로 얻은 수익보다 더 큰 수확을 얻게 된다. 바로 높은 가격대에 익숙해진 고객의 인식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루이 비통은 신흥 시장에 집중해 새로운 국가에 진출하고 시장점유율을 선점하고 확보해 왔지만, 공격적인 신규 시장 공략으로 인해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다소 희석되었다는 평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티스트와의 협업이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작용해 기존 고객층을 다시 불러들였다. 루이 비통과 무라카미 컬래버레이션 컬렉션이 공개된 해, 최상급 가죽을 활용한 고급 제품 라인을 출시하며, 전에 볼 수 없었던 가격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은 많은 바를 시사한다.



<레이디 디올 셀레브레이션> 전시 전경
 2023 디올 성수 © Christian Dior 사진: 신경섭



메세나로 이어지는 패션과 예술의 조우

럭셔리 패션 하우스들은 협업의 범위를 매장 디스플레이, 쇼윈도 디자인 등 매장의 환경 영역으로도 확장해 나갔다. 2005년 10월, 루이 비통은 2년 가까이 리뉴얼 작업을 거쳐 샹젤리제 메종(Maison Champs-Élysées)을 공개했다. 빛의 도시에 들어선 샹젤리제 메종은 매장 경험을 전에 없던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곳의 진정한 타겟은 파리지앵이 아닌, 매해 프랑스의 수도를 찾는 수천만 명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꿈의 실현’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체험하도록 안내하기 위함이었다. 루이 비통의 첫 문화 전시공간인 에스파스(Espace)가 들어선 샹젤리제 메종의 성공은 이내 서울을 비롯한 세계 주요 도시에도 브랜드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메종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플래그십 건축물의 화려한 외관과 함께 매장 영업시간 이후에도 만나볼 수 있는 쇼윈도에서의 협업을 논할 때 에르메스를 빼놓기 힘들다. 에르메스 코리아는 메종의 본국인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의뢰를 국한하는 대신 2006년부터 배영환, 권오상, 정연두, 잭슨홍, 길종상가를 비롯한 한국 출신 아티스트에게 국내 매장의 쇼윈도 작업을 수차례 맡겨왔다. 단순 제품 전시가 아닌 국가별 예술가의 창의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행보는 에르메스의 또 다른 문화예술 분야의 업적인 ‘미술상(Missulsang)’을 떠올리게 한다.

2000년 외국 기업 최초로 한국 미술계와 현대미술가를 지원해 문화예술계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취지로 출범해, 이름마저 한글 그대로 지었다. 국내 아티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해외 명품 브랜드가 현지 고객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한국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에르메스의 사례가 빛나는 이유는 바로 오랫동안 일관성 있게 한국 미술가들과 협업을 지속해 왔다는 점이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You see me> 
2006 Launch party of Eliasson at Louis Vuitton,
 New York, 2006 Photo: Patrick Mc Mullan



패션 기업, 21세기 예술 후원자로 거듭나다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과 아트 마케팅은 고객의 브랜드 인지도를 재설계할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현장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더 많은 대중을 미술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인지도가 높은 다국적 기업의 만남은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낳고 신뢰를 구축한다. 협업을 통해 예술가들은 전례 없는 수준의 창의성을 기업에 가져왔고, 기업은 전 세계 숨은 재능을 발굴하고 거장과 협업하며 때로는 미술 시장에서 이들의 ‘가치’를 향상시켜주고 친밀감을 심어 주었다.

럭셔리 패션과 예술의 동행은 현재 진행 중이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지난달 1일 개막해 6월 30일까지 진행되는 전시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Cartier, Crystallization of Time)>은 ‘까르띠에 컬렉션’으로 불리는 소장품들과 아카이브 자료 300여 점을 한데 모아 까르띠에 스타일이 갖는 강력한 문화와 창조적 가치를 보여준다.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공개된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의 구찌 크루즈
 2025(Gucci Cruise 2025) 컬렉션 © Gucci



전시 디자인은 아티스트 스기모토 히로시(Hiroshi Sugimoto)가 공동 설립한 일본의 건축 회사 신소재연구소(New Material Laboratory Lab)에서 맡았고, 한국의 전통 직물인 ‘라(羅)’라는 섬유의 제작 방식을 복원해 활용하고자 온지음과 협업했다. 그런가 하면 에르메스의 장인기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전시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Hermès In The Making)>이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잠실 롯데월드타워 잔디광장에 열렸고, 구찌 크루즈 2025 컬렉션은 지난달 13일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터빈 홀(Turbine Hall)을 배경으로 진행됐다.

1984년 이래 지난 40년간 현대미술재단을 운영해 온 까르띠에를 필두로 LVMH, 케어링(Kering) 등 럭셔리 대표 주자들은 문화재단과 미술관을 설립하며 상업과 비영리 영역의 경계까지 허물어가고 있다. 구찌 모기업 케어링 그룹이 운영하는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 피노 컬렉션(Bourse de Commerce - Pinault Collection)에서는 작가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카르트 블랑쉬(Carte Blanche)를 한국 미술가 김수자에게 부여한 <흐르는 대로의 세상> 그룹전을, 이탈리아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에서는 2025년 리움미술관에도 순회가 예정된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개인전 <Liminal>을 만날 수 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전경 © Louis Vuitton



젠틀몬스터 2024 젠틀 젤리(GENTLE JELLY) 
컬렉션 © Gentle Monster



까르띠에는 과거 메종과 협업한 인연이 있는 장-콕토(Jean-Cocteau)의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Peggy Guggenheim Collection) 개인전을 후원했다. 이들 21세기 예술 후원자들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이 더해진 메세나 활동을 통해 ‘지속 가능한’ 아트 마케팅의 유기적 성장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최근 들어 팝업 레스토랑과 호텔을 짓고, 밀라노 가구박람회(Salone del Mobile) 기간 신제품 가구를 소개하며, 올림픽을 후원하고,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진출하는 앞다퉈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럭셔리 브랜드. ‘예술과 패션의 동행’이라는 이 기나긴 여정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지 새삼 궁금해진다. PA


Cartier Paris, Academician’s Sword for Jean Cocteau 
1955 Gold, silver, emerald, rubies, diamond, white opal
 (originally ivory), onyx, blue enamel, and steel blade)
 Lenght: 87cm Antoine Pividori, Collection Cartier 
© Cartier - © Adagp/Comité Cocteau, Paris, by SIAE 2024



글쓴이 황다나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프랑스 파리 시앙스포(Sciences Po)를 졸업했다. 루이 비통 근무 당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과 함께한 ‘Eye See You’ 쇼윈도,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 제품 협업을 경험하며, 예술과 비즈니스의 조우에 매료됐다. 미국 뉴욕 소더비 인스티튜트(Sotheby’s Institute of Art)에서 「The Art of Art Marketing」(2009)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해외문화홍보원을 거쳐 루이 비통 코리아 문화예술기업 홍보부장, 이화여자대학교 아트&럭셔리 비즈니스 MBA 겸임교수직을 역임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Nu féminin, Asnières>
1907 Tin-glazed earthenware Diam: 24.8cm
© Succession H. Matisse Photo: Digital image,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Scala,
Florence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Purchase, 2001




Special Feature No.2
패션과 예술: 시대의 기분
● 김성연 기자


패션과 예술의 관계

“패션은 상품이라는 물신에 어떻게 숭배해야 하는지 의례를 지정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1927-1940)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썼다. 그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인이 럭셔리 패션 하우스의 뮤즈가 되는 미래를 말이다. 구찌 크루즈 2023 컬렉션은 신성 로마 제국의 유산인 성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에서 열렸다. 테마는 코스모고니(Cosmogonies). 벤야민의 별자리식(Constellation) 사유에서 영감을 받았다.

당시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현 발렌티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는 이전에도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가 도입한 개념인 리좀(rhizome)을 여성복 디자인 콘셉트에 적용하는 등 패션이 예술을 탐구하는 학문을 품은 채 시대와 공명하는 결과물이자 자유로운 형태를 띠는 하나의 작품임을 보여주었다.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From the Heart to the Hands: Dolce&Gabbana
(Dal Cuore alle Mani: Dolce&Gabbana)>에 소개된 의상
 © Dolce&Gabbana



패션과 예술은 갈수록 쉽게 자주 서로에게 가닿고 있다. 이때의 예술은 근대적 예술체계를 확립한 샤를 바퇴(Charles Batteux)가 『동일 원리로 환원된 순수예술(The Fine Arts Reduced to a Single Principle)』(1746)에서 정의한 시, 회화, 음악, 조각, 무용이 속하는 순수예술보단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포함한 현대예술에 가깝다. 영원과 탐미라는 우아한 원천에서 기인한 예술의 개념은 회화와 조각처럼 정지로 완성되는 순수예술과 더불어 일시성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행위예술, 대지미술, 설치미술과 같은 장르가 추가된 현대예술로 확장된 지 오래다.

패션도 달라졌다. 등장은 신체 보호라는 효용과 시각 만족이라는 명목에 의해서였다. 이후 패션은 빠르게 바뀌는 사회의 산물로서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용을 위한 필요를 넘어 시각예술과 맞닿아 행보하게 된다. 패션이 예술로서의 정당성을 갖췄다는 논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Sleeping Beauties: Reawakening Fashion> 
Painted Flowers 전경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두 영역이 다각도로 확대·변모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패션을 예술로 인정하지 못하는 일각이 존재하는 이유는 패션의 주된 특성인 상업성에서 찾을 수 있다. 미학적으로 수준 높은 성취를 이뤘다고 할지라도 결국 패션은 경제적 이해가 얽힌, 쓸모가 곧 가치의 척도인 산업이라는 것이다. 반대의 견해도 존재한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이하 MET) 의상 연구소의 큐레이터이자 미술비평가로 활동한 리처드 마틴(Richard Martin)은 패션이 미술과 달리 숨김없이 상업성을 드러내는 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인식했다.

여기서 과거부터 예술가에게 있어 후원자와 예술애호가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 그리고 오늘날 아트페어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복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질을 차치하고 존속만 놓고 본다면 예술에 있어 상업성은 미학적 가치만큼은 아니더라도 늘 중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과 가난이 묶음인 사회는 필연적으로 예술의 고고함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패션을 설명하는 일시적, 상업적 속성이 예술에서 발견된다. 예술을 대표하는 심미적, 철학적 속성이 패션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패션은 예술인가.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From the Heart to the Hands: Dolce&Gabbana
(Dal Cuore alle Mani: Dolce&Gabbana)>에 참여한  
디지털 아티스트 펠리스 리모사니(FeliceLimosan) 
작업 전경 © Dolce&Gabbana



패션과 예술이 지나온 시간

패션 컬렉션은 둘로 나뉜다.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레디 투 웨어(ready-to-wear) 혹은 프레타 포르테(prêt-à-porter)와 짙은 예술성을 띠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패션을 예술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고급 맞춤복’을 뜻하는 용어인 후자의 도입으로 본격화되었다. 1858년 영국 출신 패션 디자이너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는 소수 상류층 여성을 겨냥해 첫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다.

복식 디자인을 미적 창조의 행위로 본 그는 고객의 수요가 아닌 자신의 창작욕을 작업의 동력이자 예술적 표현의 재료로 삼았다. 천이 디자이너를 위한 캔버스가 된 셈이다. 옷에 서명을 부착한 것도 의복을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하고 대우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코르셋의 해방으로 여성복 모더니즘을 실천한 프랑스 디자이너 폴 푸아레(Paul Poiret)가 이러한 정신을 계승한 인물 중 하나다.



힌두 네크리스, 까르띠에 1936, 
1963 © Cartier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여성이 사회로 진출함에 따라 패션의 성격도 실용적으로 급변한다. 당시 예술사조는 곡선과 장식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로 상징되는데, 그 자리를 직선과 구조를 통한 간결성에 몰두한 아르데코(art déco)가 대체하기 시작한다. 예술양식이 변천되자 패션 트렌드도 달라졌다. 실루엣은 곡선이 아닌 직선이 유행하고, 디자인은 단순해졌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등이 이끈 입체주의, 즉 큐비즘(cubism)의 등장도 큰 변화의 국면을 맞게 했다.

미래주의(futurism), 구축주의(constructivism) 예술가들이 미술뿐 아니라 의복에도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며 정치적 경향을 드러낸 것도 이 시기다. 패션과 예술이 협업한 시초로 불리는 1937년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가 장-콕토(Jean-Cocteau),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등과 맺은 파트너십은 패션에 접목된 초현실주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Installation view of <Louise Bourgeois: The Woven Child> 
at Hayward Gallery 2022  © The Easton Foundation/DACS,
 London and 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The Hayward Gallery  Photo: Mark Blower



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다시 한번 예술가들에게 공포를 안긴다. 작업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려는 움직임은 1950년대 중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과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과열로 이어진다. 규칙 없이 흩뿌려진 물감들이 내적 세계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써 화면을 채웠고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대표하는 팝아트(pop art)로 연결된다.

당대 패션 시장은 자유를 갈망하고 자기표현 욕구가 강해진 젊은 층의 높은 관심과 섬유, 직물 관련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점차 규모를 확대한다. 1980년대 패션 산업은 제3국의 문화양식 적극 도입, 흑인 문화 확대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을 투명하게 흡수했고, 그 결과 혼합과 중첩으로 구현하는 브리콜라주(bricollage), 패러디(parody) 등의 표현기법이 의복에 적용된다. 이 같은 시간들 속에서 패션과 예술은 개인과 사회의 곁을 지키며 일종의 사료로서 홀로 또 함께 동시대를 통과해 오고 있다.



Finale Text_Mirrores Incognito Glasses S/S 2008 
이미지 제공: Parodi Costume Collection
사진: David Gary Lloyd 



패션과 예술이 공유한 공간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은 기억의 밀도를 높여 휘발을 늦춘다. 패션 브랜드가 예술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간을 적극 활용하는 까닭이다. 패션쇼는 20세기 후반 활성화되었다. 컬렉션 외에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실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이 마련된 것이다. 라벤더 들판, 하와이 해변, 밀밭, 베르사유 궁전. 1990년생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시몽 포르테 자크뮈스(Simon Porte Jacquemus)는 이곳들을 무대로 택해 감각적인 미장센을 완성했다. 특히 화제를 모은 라벤더 들판에서의 2020 S/S 컬렉션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회화 <월드게이트에서의 봄의 도래(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2011)와 크리스토와 잔-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 부부의 설치 작품 <둘러싸인 섬(Surrounded Islands)>(1981-1983)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올해 자크뮈스는 미술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2024 S/S 컬렉션 ‘조각들(Les Sculptures)’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조각 작품과 프랑스 마그 재단 미술관(Fondation Maeght)에서 펼쳐졌다. 이곳은 루이 비통 여성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ére)가 2019 크루즈 컬렉션을 소개한 미술관이기도 하다. 지난 3월엔 제스키에르의 10주년을 기념해 그의 첫 쇼 장소인 루브르 박물관 쿠르 카레(Louvre’s Cour Carrée)에서 2024 F/W 컬렉션을 공개했다. 그간 루이 비통은 브라질 니테로이 현대미술관(Niterói Contemporary Art Museum, MAC), 일본 교토 미호 뮤지엄(Miho Museum) 등 전 세계 미술관에서 쇼를 선보인 바 있다.



장인들의 수공예로 제작되는 돌체앤가바나
(Dolce&Gabbana) 컬렉션 © Dolce&Gabbana



구찌의 새 수장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의 선택도 미술관이었다. 지난 5월 13일,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지하 탱크스(Tanks)가 구찌 크루즈 2025 컬렉션을 위해 자연과 인공이 공존하는 서사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지닌 예술성과 함의에 기대어 쇼 자체를 현대예술처럼 인식하도록 유도함은 물론, 컬렉션 주제와 브랜드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패션 브랜드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미술관에 본격 입성한 것은 1983년 MET에서의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회고전부터다. 이후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등 동시대 패션계를 주도한 디자이너를 향한 헌사와도 같은 전시들이 수차례 개최되고 있다. 업계에 머문 세월과 공헌의 크기가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다. 오프 화이트(Off-White) 창립자이자 2019년 당시 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대규모 회고전 <피겨스 오브 스피치(Figures of Speech)>가 미국 시카고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Chicago)에서 열렸듯 말이다.

관람객 참여로 완성되는 패션 전시도 있다. 마이애미에 위치한 아카이브 박물관 파로디 의상 컬렉션(Parodi Costume Collection)은 지난 5월 3일까지 전시 <Margiela: In the Void>를 통해, 패션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시각·윤리적 측면을 탐구해 온 해체주의(deconstructivism)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의 작품들을 ‘공허’라는 주제로 큐레이팅했다. 1990년대 그가 사용한 아날로그 사진 기술에 기반해 관람객이 직접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전시공간에서의 자신을 기록할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하고, 사진 중 일부를 시각 자료 보관소에 보관한다. 전시는 올해 하반기 파리 소짜니 재단(Fondazione Sozzani)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한번 공개될 예정이다.



오스마 하빌라티(Osma Harvilahti)가 촬영한 
르메르(Lemaire) 2024 S/S 컬렉션 © Osma Harvilahti



디자이너가 예술가의 기획전을 지원하는 사례 역시 존재한다. 낭만주의적 요소로 주목받아 온 1986년생 잉글랜드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시몬 로샤(Simone Rocha)는 여러 인터뷰에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를 자신의 영웅으로 언급했다. 그는 2022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열린 부르주아의 개인전 <The Woven Child>에 출품된 ‘Poles’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Untitled>(1996)에 놓인 작가의 의상이 상징하는 바를 살피고 직접 설명하며 전시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도 패션과 예술은 만난다. 정제된 미감으로 국내외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브랜드 르메르(Lemaire)는 2023, 2024 S/S 컬렉션을 담은 전시 <A Sense of Place, A Sense of Time, A Sense of Tune>을 지난 5월 26일까지 파리에 이어 서울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진행했다.

공동 아티스틱 디렉터인 베트남계 프랑스인 사라 린 트란(Sarah Linh Tran)이 2022년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비롯된 컬렉션은 오랜 시간 인연을 이어온 헬싱키 포토그래퍼 오스마 하빌라티(Osma Harvilahti)와 협업한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어 두 영역의 자연스러운 조우로 연출되었다. 지속적인 공존은 작가의 커리어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미국 유리 조각 아티스트 롭 윈(Rob Wynne)은 하우스 오브 디올에 전시된 ‘자도르(J’adore)’ 텍스트 조각으로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가 간택한 아티스트로서의 명성을 확보했다.



Installation view of <Louise Bourgeois: The Woven Child> 
at Hayward Gallery 2022  © The Easton Foundation/DACS, 
London and 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The Hayward Gallery  Photo: Mark Blowe



패션과 예술이 만든 순간


한 여성이 런웨이에 오른다. 손으로 상체를 가리고 하의는 속옷만 걸친 채. 두 남성이 스프레이 건을 들고 그에게 향한다. 그의 몸에 하얀 물질을 분사하기 시작한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어느새 그는 실루엣 그대로 디자인된 화이트 슬립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하고 있다. 코페르니(Coperni)의 이 피날레 퍼포먼스는 2023 S/S 파리 패션위크 최고의 순간으로 꼽힌다. 무대 위 여성은 모델 벨라 하디드(Bella Hadid), 이를 가능하게 한 기술의 개발자는 스페인 의류 디자이너 마넬 토레스(Manel Torres)다. 브랜드를 전개하는 디자이너 듀오 세바스티앙 메예르(Sébastien Meyer)와 아르노 바양(Arnaud Vaillant)은 패션과 기술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급진적인 디자인 철학을 고수해 오고 있다.

물에 녹는 드레스를 선보인 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의 2016 S/S 컬렉션도 함께 연상된다. 두 순간 모두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다. 판매 목적이 없는 일시적 형태의 퍼포먼스로서 행위예술이라 봐도 무방하다. 예술을 재해석해 런웨이에 구현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월 은퇴를 선언해 이달 마지막 컬렉션을 앞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의 2015 S/S 컬렉션 쇼 콘셉트는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Ophelia)>(1851-1852)에서 착안했다.



르메르(Lemaire)
 <A Sense of Place, A Sense of Time, A Sense of Tune>
전시 포스터  © Osma Harvilahti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앤디 워홀(Andy Warhol), 쿠사마 아요이(Yayoi Kusama), 박서보, 다니엘 뷔렌(Daniel Buren),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이외에도 수많은 예술가가 패션 브랜드와 호흡을 맞췄다. 패션 브랜드에는 예술성과 희소성, 아티스트에게는 대중성과 새로운 수익 창출이라는 이점을 선사하기에 둘의 협업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컬래버레이션을 통한 아트 마케팅 덕에 현대예술로서의 패션의 가치가 제고되고, 예술은 다시 혹은 처음 일상이라는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 것이다.

후원은 가장 이상적인 동행이다. 비영리로 운영되는 아트 파운데이션은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메세나(mecenat) 사례 중 하나다. 르네상스 시대로 치면 메디치(Medici) 가문의 역할을 해내는 셈이다. 20세기 초엔 푸아레와 샤넬 같은 디자이너들이 예술계 인사들과 교우하고 금전적으로 지원했으며, 디올은 23세에 갤러리를 열어 피카소, 달리, 자코메티 등 수많은 대가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자 하우스 공동 창립자인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é)는 탁월한 심미안으로 소외된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양지로 데려와 빛을 보게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Installation view of Upscaled and Oversized Jeans,
 Autumn Winter 2000 WIG/FRINGE by 
@welldressedwigs 
이미지 제공: Parodi Costume Collection 
사진: David Gary Lloyd



현재 미술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 중인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아트 파운데이션으론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Fou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로에베 재단(Loewe Foundation),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 에르메스 재단(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루이 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재단 미술관 건립, 전시와 예술상을 통한 신진작가 발굴 및 육성, 박물관 복원 사업 참여, 문화예술 기관 재정적 후원, 장인정신 계승을 위한 보존 등의 활동으로 패션과 예술의 상생 그리고 발전을 도모한다.



나탈리 뒤버그(Nathalie Djurberg)
& 한스 버그(Hans Berg) ‘A Remedy’
미우미우(Miu Miu) 스페셜 프로젝트
사진: Julien Martinez Leclerc



지금, 패션과 예술

에르메스 재단이 후원하는 아티스트 컬렉티브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e)의 개인전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가 지난 3월부터 6월 9일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마련돼 있다. 보테가 베네타의 캠페인 사진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알렉스 프레거(Alex Prager)의 현실과 초현실 사이를 유영하는 작품들은 이달 22일까지 리만머핀 서울에서 소개된다. DDP에서 오는 30일까지 마련되는 전시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Cartier, Crystallization of Time)>은 까르띠에가 추구하는 미의 정수를 살필 수 있는 기회다.

특색 있는 시노그래피(scenography)로 지난 10년간 제스키에르와 루이 비통의 시너지를 더하는 데 일조한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보이스(Voices)>는 리움미술관에서 7월 7일까지 관람객을 맞이한다. 본인들의 작품 <A Thief Caught in the Act>(2015)를 기반으로 미우미우 2022 F/W 주얼리 컬렉션 ‘A Remedy’를 디자인한 아티스트 듀오 나탈리 뒤버그(Nathalie Djurberg)와 한스 버그(Hans Berg)의 작업세계는 송은에서 7월 13일까지 만날 수 있다. 전시는 프라다 재단의 큐레이터 마리오 메이네티(Mario Mainetti)가 협력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셰일라 힉스(Sheila Hicks) <착륙(Atterissage)>
전시 전경 2024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 Sheila Hicks / Adagp, 2024
사진: 이과용 / Louis Vuitton



<Forever Valentino> 'Roman Conversations' 
이미지 제공: Valentino
사진: Agostino Osio / Alto Piano



돌체앤가바나는 하우스 최초의 전시 <From the Heart to the Hands: Dolce&Gabbana>를 통해 두 창립자 도메니코 돌체(Domenico Dolce), 스테파노 가바나(Stefano Gabbana)의 창작 과정에 새겨진 영감의 원천을 생생히 전한다. 이탈리아 밀라노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를 수놓고 있는 전시는 7월 31일까지 진행된다. 로에베는 MET이 개최한 전시 <슬리핑 뷰티스: 리어웨이크닝 패션(Sleeping Beauties: Reawakening Fashion)>과 이를 기념하는 행사 멧 갈라(Met Gala)에 스폰서로서 힘을 보탰다. 전시는 9월 2일까지다. 한편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은 미국 섬유예술가 셰일라 힉스(Sheila Hicks)의 여섯 번째 전시 <착륙(Atterissage)>을 9월 8일까지 선보인다.

패션과 예술이 나눈 시공간과 순간을 건너, 다시 묻는다. 패션은 예술인가. “패션은 바람에 깃들어 공기 중에 존재한다. 사람은 그것을 감각한다. 그것은 하늘과 길 위에 있다.” 샤넬이 말했다. 패션과 예술은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혹은 분위기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어디에나 존재할 뿐이다. PA




Installation view of Semi Couture Stockman Jacket
with 3D Haute Couture Stockman Apron AW 1997 artist: vy
 NO MORE MONDAYS @no.more.Mondays + @romy.ill
이미지 제공: Parodi Costume Collection 사진: David Gary Lloyd




Special Feature No.3
미술관으로 들어간 패션
●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이 원고는 대단한 답이나 선언이 될 수 없다. 나는 패션 잡지 업계의 변두리에서 경력을 보낸 에디터이자 개인적으로 박물관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 글은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패션과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정리한 막연한 추이와 가설에 가깝다고 봐주시면 되겠다. 4대 패션 컬렉션이라는 게 있다. 매년 2회 전 세계의 안목이 가장 많이 몰리는 패션쇼가 열리는 4개 도시에서 열리는 컬렉션을 말한다. 각 도시는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영국 런던, 미국 뉴욕이다. 나열 순서는 이곳에서 쇼를 여는 디자이너들의 이름값의 합이다. 크게 보면 여기서 만들어진 것들이 (밀수를 포함한) 실질적 수출과 (표절을 포함한) 이미지적 굴절을 거쳐 전 세계인의 패션 트렌드라는 게 만들어진다.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은 교통과 문화와 자본이 모이는 국제적 대도시라 세계 수준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이 있기도 하다. 원고를 작성하는 2024년 5월 현재도 4대 패션 위크가 열리는 도시에서는 활발한 패션 관련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이하 MET) 5번가에서는 의복에 들어 있는 자연 모티프를 보여주는 <슬리핑 뷰티스: 리어웨이크닝 패션(Sleeping Beauties: Reawakening Fashion)>이 열리고 있다.



Evening dress worn by Marina Schiano, 
autumn-winter 1970 haute couture collection 
 © Yves Saint Laurent and Estate Jeanloup 
Sieff Photo: Jeanloup Sieff



공예와 장식미술 소장품으로 유명한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ictoria and Albert Museum, 이하 V&A)은 6월 22일부터 패션모델 나오미 캠벨(Naomi Campbell)을 주제로 삼은 <나오미: 인 패션(NAOMI: In Fashion)>을 개최할 예정이다. 파리와 밀라노에는 아예 패션을 주제로 하는 자체 박물관이 있다. 파리의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는 18세기부터 지금까지의 각종 의복과 액세서리, 사진과 원화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과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도 파리와 밀라노에서 각각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도 시장 규모에 따라 박물관의 방향이 달라지는 게 눈에 띈다. 파리와 밀라노는 패션 컬렉션의 무게감으로만 보면 (도시 다른 산업의 무게감과는 달리) 뉴욕과 런던을 압도한다. 그래서인지 파리와 밀라노는 패션만을 다룬 박물관 혹은 그 도시에 본사를 둔 브랜드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갤러리가 있다. 반면 뉴욕과 런던은 보여줄 만큼 확연한 주제를 잡은 뒤 그에 따른 소장품을 전시하는, 고전적인 특별전을 진행하는 걸 볼 수 있다. 뉴욕에도 의복 전문 박물관이 있으나 그건 뉴욕 패션 공과대학교(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FIT)의 박물관이니 교육 기관의 부설 기관으로 봐야 한다.



Installation view of 
<Aldo Fallai for Giorgio Armani, 1977 - 2021> 
Dec 6, 2023 - Aug 11, 2024 Armani/Silos, 
Milan © Giorgio Armani



즉 전통적인 전시 문법으로 패션을 설명한다면 크게 두 가지 경우로 접근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먼저 의복이나 관련된 주제를 통해 당시 사회 흐름을 보여주는 경우다. 옷을 읽는 게 아니라 옷이라는 물증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해석하는 것이다. V&A의 <나오미: 인 패션>이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특정 주제를 정한 뒤 옷이라는 물증을 통해 통시적으로 그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예가 MET의 <슬리핑 뷰티스>다.

이에 앞서는 질문이 필요할 듯하다. 옷을 통해 시대와 주제를 보여준다면 ‘옷가지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물증’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과연 그러한가? 모든 물건에 시대의 흐름이 깃들었을 텐데 굳이 옷이라는 렌즈를 통해 시대를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옷과 패션의 사료적 가치는 무엇인가.

시대에 따라 크게 둘이라 생각한다. 신분과 날것의 욕망이다. 신분이 있던 시대에는 옷이 확연히 신분을 상징했다. 오늘날까지도 부유층 풍 의상이나 액세서리에 자주 쓰이는 딥 그린 혹은 크림슨 버건디가 그 예다. 자연 소재밖에 없고 물자 이동이 제한되었던 시대에는 특정한 색 직물 염색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가 뼈를 보고 미술사학자가 그림을 보듯 옷 역시 그렇게 시대를 읽는 사료로 볼 여지가 있다.



Wedding dress Preparation of the autumn-winter 1980
 haute couture collection, in the salons of 5 Avenue Marceau, 
Paris, July 1980 © François-Marie Banier 
Photo: François-Marie Banier



신분제가 사라진 현재는 조금 더 날것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사라지고 개별 인간의 헌법적 평등이 이루어져도 사람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서로를 구분짓고, 특정 복식을 통해 나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 복식은 이러한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을 보여주는 데에도 탁월한 역할을 한다. 생각해 보면 의식주 중 사료화하기 가장 용이한 게 패션이기도 하다. 음식은 보관할 순 없을 것이고 집은 너무 크다.

욕망뿐 아니라 기능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2010년 뉴질랜드 남극 탐험 박물관에서 100년 전 버버리 더플코트를 본 적이 있다.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과 로버트 스콧(Robert Scott)이 남극 탐험 경쟁을 펼치던 때는 그 옷이 정말 극한 지방을 탐험하던 옷이었다. 지금 도시에서 겨울에 입는 더플코트가 남극 탐험대의 장비로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의한다. 울 의류를 입고 남극까지 갔어야 했다는 기술적 한계부터 당시의 기능성 의류들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디테일까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NAOMI Photo: Dave Benett / 
Getty Images for the Victoria & Albert Museum



이처럼 주요 유니폼이나 기능성 의류는 당시 상황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질긴 천으로 만들어져 노동에 적합한 옷으로 만들어진 데님 소재 옷인 청바지가 어떻게 주류 패션계까지 들어왔는지 혹은 방수 소재가 없던 때에 면에 왁스를 코팅해 만들어진 바버 재킷이 어떻게 방수 소재가 완전히 보급된 지금까지 패션의 한 켠에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이런 요소들을 통해서도 의복과 유행의 관계를 짚어 보며 패션이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전시 목록을 보다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각 브랜드가 자체적으로 여는 전시가 많다는 것이다. 브랜드의 역사적인 아카이브 혹은 예술적인 뭔가라 주장하는 것을 직접 선보이는데, 앞서 언급했듯 밀라노와 파리에서 실제 브랜드의 이름까지 따서 운영되는 이브 생 로랑이나 아르마니 갤러리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곳에서 패션은 시각 문명의 성배 혹은 의복을 작품까지 끌어올린 뭔가로 포장되고 소비된다. 역시 질문이 따라온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들만의 잔치는 아닌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라면 이 옷들이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어야 할 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Jeandron-Ferry <Pair of beach shoes> ca. 
1870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



경우의 수 하나는 정말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있다. 시대의 이미지나 실루엣, 시대의 기술이나 정신 역할을 할 수 있는 옷이 있다(그 옷들이 그리 되기를 의도했는지와는 상관없이). 특정 옷이나 복식은 다른 세상이 온다는 신호를 주기도 한다.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의 여성용 트위드 재킷이나 초기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의 옷, 1990년대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의 컬렉션은 시대의 분기점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울러 일부 패션 사진 역시 사진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사료나 예술품 정도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경우의 수는 이 모든 것이 패션 브랜드가 진행하는 ‘브랜드 마케팅’의 일부라는 것이다. 고가 브랜드가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면 같은 물건이라도 보다 높은 가격이 책정되고, 상업의 세계에서 특히 아트가 될 경우 마진율은 높아진다. 이것이 오늘날의 패션 브랜드들이 상품에 지속적으로 작품의 아우라를 씌우고 꼬리표를 붙여 결국 스스로 아트가 되려 하는 이유다.



Man Ray <Untitled> 1927 
Silver salt proof, rayogram, posterior print 
Courtesy Association Internationale Man Ray, 
Paris © Man Ray 2015 Trust / ADAGP,
 Paris 2023 Marion Meyer Collection



이렇게 된다면 미술관의 역할 역시 본질을 벗어난다. 내가 아는 한 미술관의 역할은 작품을 수집하고 관리하며 소장선에 따라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패션 브랜드나 결과물의 아우라를 위해 만들어진 미술관이 있다면 그 미술관의 역할은 아트라 명명해주는 일종의 인증 기관이 되는 셈이다. 좋든 싫든 이런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더욱 격화되고 심화될 거라 예상한다.

세계적인 패션 도시는 아니지만 서울에 갖가지 패션 이벤트가 열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럭셔리 브랜드는 끝없이 시장이 필요한데, 이들이 활동해 오던 주요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그렇다면 결국 새로운 시장에 가서 자신들의 아우라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게 서울을 비롯한 아시아의 신흥 대도시에 유럽의 패션 브랜드가 하고 있는 일이다.



<Sleeping Beauties: Reawakening Fashion> 
The Garden 전경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렇게 전락하지 않으려면 상품 자체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 대표적인 경우는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전시다. 아블로는 칸예 웨스트(Kanye West)와의 작업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유색인종 최초로 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Louis Vuitton Moët Hennessy, 이하 LVMH)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으나 지병으로 2021년 일찍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 2019년 자기 자신에 대한 전시를 고향에 있는 시카고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Chicago)에서 개최했다. 그의 상품이나 아이디어 전개 방식은 분명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앤디 워홀(Andy Warhol)을 잇는 대량 생산 가능한/생산된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라는 면이 있었다. 무한 복제 가능한 크리에이티비티는 대량 생산된 제품 위에 인쇄되고, 인쇄된 것은 그 자체만으로 예술품의 아우라를 획득해 예술품으로 격상된다.



Installation view of <Fashion on the Move #2 >
 April 26 , 2024 - January, 5 2025 Palais Galliera, 
Paris Photo: Gautier Deblonde



아블로 같은 선례까지 생겨 버렸으니 브랜드들은 더욱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패션을 소재로 하는 전시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패션 브랜드들이 여러 가지 모호하고 예술적인 주제의 전시를 선보인 적이 있다. 그 전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올림픽이 극한에 닿으려는 인체와 스포츠의 향연인 동시에 제한된 광고주에게만 허락된 광고판인 것처럼, 높은 수준의 콘셉트와 스탭으로 구현된 상업 예술 전시인 동시에 해당 브랜드에 대한 광의의 선전인 것이다.

그 면에서 흥미로운 것이 V&A에서 열릴 나오미 전시다. 백인 위주의 패션 월드에서 나오미의 등장과 성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는 흑인 모델로는 처음으로 1988년 파리 『보그(Vogue)』 표지 모델이 되며 패션 역사에 남는 아이콘이 되었는데, 전시는 나오미가 입었던 옷들과 그 자신의 취향을 따라가며 ‘나오미 캠벨이 현대 패션 월드에서 해 온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Sleeping Beauties: Reawakening Fashion> 
Reseda Luteola 전경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다른 면을 보면 조금 입체적이다. 나오미는 휴고 보스(Hugo Boss)와 함께 캡슐 컬렉션을 발매했다. 본인이 디자이너가 되어 만든 컬렉션이다. 그리고 V&A 나오미 전시의 메인 스폰서가 휴고 보스다. 이런 식이다. 아이콘이 자본의 힘을 통해 박물관에 들어가 평가와 분석을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알리는 동시에 이 모든 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케팅 이벤트가 된다.

현대사회 패션의 마력 중 하나는 모든 걸 패션화시킨다는 것이다. 패션화라는 건 원래 다른 정신이나 가치를 가지고 있던 것이 돈 주고 살 수 있는 패션 아이템으로 격하되는 것이다. 현대의 패션 브랜드는 국제적 기업활동과 결합해 이런 식으로 모든 개념을 먹어치운 뒤 패션의 이름을 붙여 값비싸게 팔고 있다.



Roger Rouffiange 
<Beach ensemble by Schiaparelli> 
1936-1937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s



패션화가 휩쓸고 간 분야는 이미 너무 많다. 조금 과장하면 1980년대 이후부터 자생적으로 발발한 청년 문화는 거의 예외 없이 모두 패션 월드의 이미지 레퍼런스에 편입되어 버렸다. 미국 서부의 청년들이 말 그대로 몸이 깨져가며 만들어낸 스케이트보드 문화는 이미 반스(저가)부터 팔라스(고가)까지 패션 브랜드의 광고판이자 영감의 원천으로 전락했다. 독일에서 만들던 튼튼한 여행 가방 브랜드 리모와 역시 LVMH에 인수되며 그간의 신화로 높은 가격을 정당화시키는 비싼 여행 가방이 되었다. 가장 극적이면서도 대표적인 경우가 힙합이다. 어쩌면 박물관으로 간 패션이라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박물관 전시라는 교양의 발현이 그저 패션 피플들이 잠깐 쓰고 마는 한철 유행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욕망이든 기능이든 옷가지가 뭔가를 보여준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패션은 사회에 선행하는가, 후행하는가. 패션 전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이 질문의 답을 위한 근거가 될 것이다. 내 의견은 사회에 선행하는 예술의 역할을 하는 패션이 있고, 사회에 후행하며 사람들의 욕망 등 당대를 보여주는 패션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패션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패션 전시의 쓸모는 있다고 생각한다. 제품을 작품으로 둔갑시켜 사람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려는 브랜드의 심리적 연금술에 놀아나지 않으려면.PA
 


Dress worn by Ewa Meissner, autumn-winter 
1993 haute couture collection
© Yves Saint Laurent
 and Claus Ohm - DR Photo: Claus Ohm



글쓴이 박찬용은 잡지 에디터, 저자다. 서강대학교 영미어문학과를 졸업하고 2009년부터 한국의 라이프 스타일 잡지 업계에서 에디터로 활동했다. 『에스콰이어』, 『아레나 옴므 플러스』 등 매체, 『매거진B』를 만드는 디자인 에이전시 등에서 일했다. 『첫 집 연대기』, 『모던 키친』 등 단행본을 6권 냈다. 202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박찬용의 집>을 출품했다. 현재 새로운 논픽션 프로젝트와 전시 등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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