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큐레이터 Content Curator
이대형 Lee Daehyung
김인선 Kim Inseon
오세원 Oh Sewon
박제성 Je Baak
심소미 Sim Somi
이한빛 Vicky Lee
손엠마 Emma Son
김나형 Kim Nahyung
김지하 Kim Jiha
이예승 Lee Yeseung
서진석 Suh Jinsuk
최정은 Choi Jeongeun
Special feature No. 1
2031년 신년특집호 발행을 준비하며
● 이대형 Hzone 디렉터
2030년 11월 29일 밤 12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욕, 로스앤젤레스, 런던, 파리, 베니스, 베를린, 요하네스버그, 이스탄불, 방콕, 쿠알라룸푸르, 뉴델리, 시드니, 자카르타, 싱가포르, 홍콩 주재 현지 통신원과의 월간회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서울의 자정이 가장 안전한 시간대이다. 2031년을 한 달 앞둔 오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있을 10년을 전망하는 편집 기획회의가 꽤 길 것으로 예상된다. 마라톤 화상회의에 커피와 샌드위치, 컵라면은 필수다. 전 세계 대부분의 미술 잡지가 사라질 위기를 경험한 2022년의 차가운 겨울에서 생존한 이들이기에 앞으로 다가올 10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무엇을 대비해야 할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1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삼키는데 100일이 안 걸렸다.
글로벌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전염병을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술, 경제활동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술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 뉴욕발 전 세계 주요 미술관의 인력 감축은 팬데믹의 결과가 아닌 팬데믹이 가져올 변화의 시작이었다. 정도의 차이,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줄 안식처는 현실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대규모 관람객 수를 자랑하던 주요 미술관, 갤러리, 아트페어, 매거진 등이 온라인 편집 인력을 수혈했고, 이는 기관별 독립적인 미디어 저널리즘의 시작을 의미했다.
넘쳐나는 뉴스레터는 미술전문 매거진의 콘텐츠에 버금가는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고,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 SNS 기반 네트워크 플랫폼은 독자들의 취향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며 개인화되고, 큐레이팅된 맞춤형 정보를 하루 단위로 업데이트해주기 시작했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더니 결국 정보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졌다. 책을 대신한 유튜브, 공연장을 대신한 모바일, 현실보다 실감 나는 AR/VR 테크놀로지 등 한번 시작된 변화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이번 호의 주제는 ‘물’이다. 아르헨티나의 소금사막 살리나스 그란데스(Salinas Grandes)에서는 리튬채굴로 인해 식수난이 심각하고, 인도네시아는 플라스틱 더미가 만들어 낸 무수한 인공 쓰레기 섬으로 생태 지도가 바뀔 정도다. 베니스의 수위는 매년 더 높아지고, 수년째 비 소식이 없는 로스앤젤레스의 가뭄은 여전히 악명이 높다. 그런 이유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자카르타 담당 특파원들이 최근 더 바빠졌다. ‘물’이 중요한 생존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각 도시의 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정책을 탐사하고, 그것을 주제로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한 지역의 예술가들을 찾아야 한다.
특히 전 세계 200여 개의 대학과 연합하여 물과 생태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베니스의 NGO 그룹 We Are Here Venice의 설립자와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의 총감독은 이번 취재 대상의 핵심이다. 10년 전 팬데믹의 고통을 기억하며 각국의 사람들은 인류의 공통 문제를 함께 찾고, 그것을 함께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각국의 통신원들은 자신들의 현지 업무가 예술의 공공성을 넘어 보다 지속 가능한 인류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다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방송 매체 블룸버그(Bloomberg)에서 시작한 AI가 쓰는 기사의 정확도와 그 질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현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육성 목소리를 화면과 지면에 담기 위한 인터뷰를 하지 않고서는 기사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되어 통신원들의 강박이 심해졌다. 만나야 할 현지 사람들과 가봐야 하는 현지 이벤트에 대한 취재의 상당 부분을 각자의 로컬 네트워크 안에서 모두 해결하며, 새로 생긴 취재 윤리강령을 점검한다. 가짜뉴스에 대한 전 세계적인 규제가 심해지면서 법정의 증인 서약서에 버금가는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미술전문 매거진 역시 그 흐름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취재원과 기자 모두에게 진실에 기반을 둔 책임 있는 인터뷰를 요구하여 기사의 정확도를 높이자는 취지 때문에 자칫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 여론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속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하는지 알 정도의 사회적 합의가 생겼다. 하지만 그렇기에 용기 있는 취재원의 인터뷰를 따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며, 취재원에 대한 크레딧과 보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취재의 결과물을 영상으로 갈 경우와 디지털로 편집할 경우, 최종적으로 지면으로 남길 부분을 구분하고 독자의 반응지표에 따른 설득력 있는 혜택 등을 잘 설명해줘야 한다. 그래야 추후 분쟁을 줄일 수 있다.
이번 호의 지면 버전 역시 독자들의 사전 계약에 기반을 둔 수요예측을 통해 5,000부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종이에 인쇄된 미술잡지에 대한 수요는 줄었지만, 역으로 그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매거진 컬렉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천연재료를 이용한 인쇄기법이 표준화되며 구현할 수 있는 컬러의 범위는 축소되었어도, 생생한 화질은 디지털에서 보고, 견고하게 화석화된 지식은 종이매체를 통해 수집하는 현상이 독자들에게 생겼다. 또한 단순 정보 차원을 넘어선 긴 호흡의 칼럼을 쓸 수 있는 필진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대량 정보의 디지털 확산과 정보의 깊이를 담아낼 지면 매거진 모두를 기획해야 하는 월간 편집회의가 매번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글쓴이 이대형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현대자동차 아트 디렉터로 글로벌 아트 파트너십 프로그램을 총괄 기획했다. 2018년과 2019년 유럽연합 ‘STARTS Prize’ 심사위원을 맡은 그는 과학, 테크놀로지, 예술, 비즈니스의 융·복합 실험 프로젝트를 발굴하며 21세기 예술이 어디에서 어떻게 거주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다.
살리나스 그란데스(Salinas Grandes), Jujuy, Argentina 이미지 제공: g/AdrianWojcik/Shutterstock.com
Special feature No. 2
시스템의 변화는 개인의 실천들로부터
●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대표
예술의 활성화를 위한 공적 기금이 여러 가지 지원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제공되고 있다. 특히 비영리 활동 공간에 제공되는 운영기금은 2000년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크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1999년도에 설립된 몇몇 대안공간의 활동 열의와 중요성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애초에 개인의 활동으로 대안공간이라는 시스템이 형성되었고 이에 대한 검증의 시간을 거친 후 보조금 개념의 지원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개인이 기존과 다른 가치를 스스로 양산해내자 공적 제도가 움직여준 것이다.
이후 예술 활동에 대한 지원이 점차 늘어났고 그 단위들도 다양해졌다. 기금 지원 서류를 작성하고, 집행한 기금의 정산 및 결과보고서 서류에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는 것이 이제는 미술계의 일반적인 풍경이 되었다. 이런 환경은 어떤 면에서는 실제 예술 활동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금 제도가 설정한 시스템을 만족시키는 활동으로만 스스로를 국한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본인도 개인적으로 전시공간을 운영하면서 기금을 늘 살펴보고 있으며 전시를 중심으로 한 미술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이는 공간의 지속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공간의 역할을 설정하고 세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면서 고유한 성격이 구축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많은 경우 미리 성격을 설정하여 기존 시스템의 원칙에 따라 운영 방향을 설정한다.
여기서 기존 시스템이라 함은 거칠게는 미술관, 화랑,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좀 더 넓은 범위로는 영리(commercial)와 비영리(non-commercial)로 나눌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대안공간은 1990년대 말, 기성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미술 신(scene)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또 하나의 기성으로서 자리가 잡히고 있다. 예술이 가진 유연성과 잠재력을 고려할 때, 창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경우 독창성과 실험성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하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공간을 보는 견해는 다소 보수적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영리와 비영리 영역의 명확한 설정과 활동의 한계지점을 요구함으로써 시스템별 영역에서 겪는 한계에 대한 극복을 차단당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미술의 시스템에 대한 미세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감지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다. 현재 전시별로의 미시적 탐구를 둘러싼 현장에서의 개성 있는 변화들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예술의 다양성과 유연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리/비영리로 구분되었던 시스템이 특정 개인이나 프로그램들을 통해 이미 서로 중첩되고 혼재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시스템으로 시각예술을 아우르고 있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특정 분야의 얼개들이 다양한 방향성과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 풍경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생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재 한국의 미술계에서는 취약한 상태인 전문적 예술 행정이 절실하다는 것도 납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여 전시 환경의 변화를 경험했고 개인의 판단과 활동이 더욱 중요해졌다. 대중의 안전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공기관은 심각성의 정도에 따라 기능이 정지되어야 하지만, 개인의 활동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온라인, 영상 등 새로운 매체와 매개 방식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미술 시스템의 변화가 가속되고 있음을 산발적으로 접하고 있다. 이미 시각예술 분야의 다양한 경향으로의 변화는 코로나 시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왔다.
2020년 내내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와중에 현재 여러 대응은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이행되어 온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현대미술의 매체와 형식이 다양해진 만큼 이들을 소개하고 결과물에 대한 유통을 확장하고 있는 시스템은 조금씩 꾸준히 그 변화를 시도해 왔다. 기존의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개인들의 사유와 이를 실천하는 다양성, 즉 교육, 현대미술 안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윤리, 관람객과 작가, 기획자, 컬렉터 등 미술 시스템을 구성하는 예술인들의 역할이 혼재되고 있는 지속적인 현상들을 보다 체계적이고 거시적으로, 동시에 섬세한 지형도 위에서 들여다볼 수 있으면 한다. 이는 분명 예술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개인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모여서 이룰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서 파악될 것이다.
글쓴이 김인선은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안공간 루프 큐레이터, ‘광주비엔날레’ 코디네이터, ‘부산비엔날레’ 코디네이터, 큐레이터, 프로듀서, 국제갤러리 부디렉터,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사무국장, 대림미술관 학예실장,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디렉터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전시 공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을 운영하면서 국내 작가들을 소개하고 국내외 전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Escaped light landscape> 2020 Spotlight, halogen bulb,
LED light, tripod, lenses, colour-effect filter glass (cyan, orange, blue), concave glass mirror, aluminium,
brass, plastic, motors, control unit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Symbiotic seeing,Kunsthaus Zürich, 2020 © the artist; neugerriemschneider, Berlin; Tanya Bonakdar Gallery,
New York / Los Angeles © 2020 Olafur Eliasson Photo: Franca Candrian
Special feature No. 3
MZ세대 어택
● 오세원 씨알콜렉티브 디렉터
고령화 사회에도 어떤 분야나 현장은 젊음을 요구한다. 정년이 모호한 미술계에도 20-30대 작가, 큐레이터, 그리고 컬렉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활동이 눈에 띈다. 대략 16-39세에 이르는 다소 광범위한 연령층을 타깃으로 삼는,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가 수면 위로 떠 오르고 있다. 이미 분석된 세대적 특성에 의하면, 이들은 디지털-모바일 환경에 매우 익숙하고, 이색 경험과 의미를 소비하는 데에 적극적이다. 점심은 밀 키트(meal-kit)나 삼각김밥으로 때우지만, 저녁은 찐친과 거한 식사로 플렉스(flex) 하고, 직접적인 반응을 교환하는 전화통화보다 이메일이나 SNS, DM 그리고 카톡으로 소통하는 것이 편하다.
우리 사회는 시스템으로 움직이기보단 아직 맨 파워(man power)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마케팅 상의 분류일진데, MZ세대라는 특정 연령 구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현장의 주역이자 최고의 소비 주체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The Art Market 2020」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적인 고액자산가 컬렉터 중 밀레니얼 세대가 49%로 비중이 높다고 한다. 게다가 글로벌 팬데믹 코로나19가 불러온 소비 행동 양식의 변화가, 이들이 작품 전시와 유통시장에 반응하는 방식과 유사하고, 심지어 이들이 리드하는 방향으로 가속도가 붙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씨알콜렉티브도 이때가 유망한 신진작가를 선정하여 익년의 작가 라인업을 완성하는 시기이다. 올해도 지난해와 유사하게 많은 수의 지원자가 있었고, 연령제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하는 작가 대부분도, 선정된 작가도, 모두 MZ세대이다. 이들은 현재 주목받는 특정 작가 또는 이론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실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주변인으로서 경험한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사회적 가치나 의미를 세우고, 이에 대한 메시지 전달에 집중한다.
2020년 올해 씨알콜렉티브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은희 작가도 MZ세대로, 기계-테크놀로지의 발달 이면에 여전히 요구되는 인간노동에 관심을 가진다. <회생비용>전에서는 장애와 회복을 위한 기술을 추적하면서 노동을 위한 인력으로서의 도구적 접근으로 구분되는 사회체제 전반에 비판적 시선을 던진다. 올해 선정된 무니페리(Mooni Perry) 작가도 대만에서 거래되는 빈랑의 판매루트와 방식을 따라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추적하는 영상을 준비 중이다. 올해 온라인으로 진행된 ‘아트토크’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김나현 기획자의 전시 <크림>도 자본주의 판매 전략을 전시장에 그대로 전유한다.
전시는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보이는 모호한 제스처이기보다는 적극적인 자기 비판적 ‘업계’ 포맷으로, 미술계를 일종의 ‘산업계’로 상정한다. 그래서 참여 작가들/CEO의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태도를 통해 시장에 취약한 젊은 작가들의 상황을 드러낸다. 해외에도 미디어 활용에 익숙하고, 사회적 개입에 적극적인 MZ세대, 소위 ‘오리엔탈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레바논에서 출생해 활동 중인 로렌스 아부 함단(Lawrence Abu Hamdan)은 2016년 ‘광주비엔날레’, 올해 백남준아트센터에서의 기획전 <침묵의 미래: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순간>을 통해 사운드 영상 설치 작업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그는 사운드와 영상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추적하고 정치, 경제, 인권에 대한 사회 문제를 노출시키는 도발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또한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서 반향을 일으킨, 영국에서 활동 중인 - 팔레스타인 출생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 맨디 엘사예(Mandy El-Sayegh)도 이 세대적 특징을 보인다. 작가는 과잉 정보 사회 속에서 선별된 넷-자료를 평면 위에 복합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그만의 텍스트를 탐구한다. 수많은 레퍼런스로 두터워진 콜라주-레이어와 즉흥적인 스트로크(strokes)는 혼돈과 모호함으로 규정할 수 없는 동시대성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물론 여기 짧게 언급된 작가, 큐레이터들은 다소 무리하게 특정 구분에 껴 맞춰져 단편적인 측면만 강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인이었던 MZ세대가 미술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독특한 행동 양식과 의사결정으로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뚜렷한 시각과 텍스트를 탑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의 행보를 주목하게 된다.
글쓴이 오세원은 현재 재단법인 일심, 씨알콜렉티브(CR Collective)를 운영하고 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School of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예술 행정, 홍익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 개관 팀장을 시작으로, 아르코미술관 학예실장, 문화역서울 284 개관 운영총괄팀장 및 공예·공공 디자인진흥사업팀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현재는 삶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시각예술을 매개로 씨알의 잠재력 발굴, 확장에 관심을 갖고 콜렉티브로 활동 중이다.
이은희 개인전 <회생비용(Cost of Recovery)>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씨알콜렉티브
Special feature No. 4
NOW: A Dialogue
● 박제성 서울대학교 교수
0: 지금 미술잡지 「퍼블릭아트」가 다뤄야 하는 주제는 무엇일까요?
1: 고민해야 할 몇 가지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네요. ‘지금’, ‘미술’, 잡지의 제목인 ‘퍼블릭아트’. 우선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우리는 기술 주도의 미래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주어진 가치 정립 기회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흔히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입체적인 변화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로 인해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구조 변화가 지나치게 부각되지요.
0: 그렇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있어 산업이나 경제적인 측면보다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은 가치 체계의 변화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지금의 변화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 즉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에 더욱더 가깝습니다. 개념적으로도 이와 연결되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종교가 주도하던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로 진입하였듯이 그간 구축되어온 자본주의, 경제적인 가치가 주도하던 사회 체계가 붕괴되고 기술을 주도로 새로운 가치의 정립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따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기존의 견고한 틀들이 이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분열과 대립이 극화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 등 기술의 변화를 정치 사회적 구조가 반영하지 못하면서 왜곡된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2019년 현대 모터스튜디오 <Re-Vis-It>을 통해 선보인 프로젝트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데이터를 3D 프린팅하여 물성화하고 공간화해 인과를 부여하는 설치 작업,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과 뇌파를 통해 생성된 사운드를 공유하는 퍼포먼스는 이러한 ‘지금’을 기술에 의한 개인의 감각과 인식의 충돌을 통해 드러냅니다.
1: 태허(우주)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풀이하고 세상의 중심을 다시 정립하고자 했던 홍대용이 떠오릅니다. 기술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을 예가 아닐까요? 지금 미술은 우리가 어떠한 미래를 원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과거 자본주의의 폭주와 같이 미래가 또 다른 방향으로 왜곡되기 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논의를 위해 미술을 포함한 예술 영역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자 기술과 자본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지요.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미래기술관의 마지막 전시는 ‘인공지능 인큐베이터’라는 미디어아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작품에서 관람객들은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어린아이처럼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친구가 무엇인지, 실수가 무엇인지, 내가 어떠한 모습이길 바라는지 등 일상적인 질문들로 시작된 대화는 인공지능을 점차 성장시키며 내(인공지능)가 자유의지를 가져야 하는지, 환경과 인간 중 어떠한 가치를 우선하여 판단해야 하는지 등의 첨예한 질문들로 대화를 이끕니다. 미래기술에 대한 비전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미래기술관을 나오기 전 마지막 공간에서 나는 이 기술들을 이끌어갈 가치에 대한 질문들을 맞이하고, 과연 이 미래의 주체가 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0: 이러한 ‘지금’의 변화로 인해 미술의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이 재정립되어야 하는데 권위적이고 계몽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여러 영역 간의 교류와 공감을 통해 함께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미디어아트나 아트 &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한 융합의 움직임들이 시대 담론과 맞물려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그 책임 또한 크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나 기술을 적용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아야 하며 비평적인 태도를 중심에 두고 이를 다루며 소통해내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1: 동의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단순히 영역 융합의 문제가 아닌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미술의 주체, 미술의 대상 재정립이 고민되어야 합니다. 이는 미술 교육의 문제와도 맞물리는데 미술은 전공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양한 미술의 주체들을 품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우리나라에서 특수한 재능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예술 영역이 모두가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태도이자 언어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간 기본 교육 체계에서 미술, 음악, 체육 등의 영역을 소외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사회 가치 체계의 공백들이 지금의 다양한 사회 문제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맞이하는 미래를 위한 선결 과제로 여겨져야 합니다.
0: 그러한 측면에서 이 잡지의 제목인 ‘퍼블릭아트’, 즉 공공미술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지금’의 변화와 맞물려 사회가 변화하고 공공성의 개념도 달라집니다. 공공성에 대한 정의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담는 중요한 척도이지요. 공공미술이 공공장소에 있는 작품이 아닌 그 사회의 공공성을 담은 미술이 되기 위한 미술계를 포함한 전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감과 소통의 미술로 변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공공미술이라는 개념과 역할이 확대되고 왜곡된 미술의 주체와 구조를 정상화하는 과정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1: 그렇다면 지금 미술잡지 「퍼블릭아트」가 다뤄야 하는 주제는 무엇일까요?
글쓴이 박제성은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영국 런던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과 서울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영국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 ,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13>,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16’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2010년 ‘중앙미술대전 대상’, 2016년 ‘VH 어워드 그랑프리’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제성 <String> 2019 현대 모터스튜디오
Special feature No. 5
장소 상실과 전시 경험에 대해
● 심소미 독립큐레이터
“이 세계의 어떠한 장소의 부재가 훗날 새로운 장소의 등장을 요청하는 것일까?"
에피소드 #01 텅 빈 공항
전 지구적 팬데믹에 휩싸인지도 한 해가 거의 다 되어 간다. 불과 얼마 전, 10월 어느 날 나는 인류에게 요구되는 거리두기의 두려움을 안고, 프랑스로 향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장소는 공항이다. 방역 정책으로 국경 간 이동이 자유롭지 않게 되자, 여행객들로 북적였던 공항이 텅 비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바람에 천창의 빛만을 공간 속으로 깊게 흡수한 분위기는 인류가 사라진 하나의 디스토피아와도 같았다. 광활한 공간의 매끄러운 대리석 타일이 빛에 반짝거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AI 로봇만이 홀로 덩그러니 서서 사람들과의 소통을 기다린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디로 향하시나요?” 거리두기의 강령으로 서로 간 접촉이 어려워진 인류에게, 로봇의 존재는 감염의 공포 없이 어디서든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간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서로를 스치고 뒤섞이는 이 장소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인간뿐만 아니라 국가 간, 국경 간 거리두기의 엄격한 규범 하에 허용된 신체들만이 드물게 오가는 장소가 되었다. 마크 오제(Marc Auge)가 이동과 통행을 위해 존재하는 비장소로 거론한 공항은, 이동의 통제하에서야 온전한 물리적 건축 공간으로서 남겨졌다. 우리가 다시 공항을 경험할 때, 이곳은 예전처럼 이동하는 신체들이 범람하는 비장소로 다가올 수 있을까?
에피소드 #02 텅 빈 그랑팔레에서 보물찾기
물리적으로 전시를 경험하는 것이 불확실한 현시점에서 전시 경험은 디지털환경과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모색돼오고 있다. AI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처럼, 온라인 공간을 통해 전시의 현존이 지탱되어 간다. 국내외 미술 행사들은 한 해 내내 취소와 연기를 발표하기 바빴고, 일부는 닫힌 전시장을 대신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열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파리의 대규모 전시장인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의 아트페어 ‘FIAC’도 취소되고, 그 텅 빈 기간 동안 페로탕 갤러리(Perrotin Gallery)가 장소특정적 이벤트를 벌인다 하여 이목을 샀다. 대규모 미술 행사 취소에 실망한 미술애호가, 그랑팔레의 역사적 건축공간에 매료된 사람들, 코로나19로 문화행사를 애타게 기다리던 관람객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소식이었다.
그렇게, 그랑팔레를 이틀간 한시적으로 점유한 행사 <WANTED>(10.24-10.25)는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엘름그린 & 드라그셋(Elmgreen & Dragset),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han) 등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장엄한 건축공간에서 찾는다는 홍보로 타임별 방문이 전석 매진되었다. 예매를 마친 관람객들이 방역 규범에 따라 조심스럽게 그랑팔레에 들어가고, 미니어처 작품 보물찾기를 한다는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은 거대한 건축공간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계단 밑, 유리창 창틀, 소화전 밑, 기둥 사이, 바닥 타일, 문틈 등. 공간을 수색하는 한바탕의 소란은 작품을 찾았다는 소리와 함께 5분 만에 종료되고, 2시간을 기다려 그랑팔레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음 보물찾기 진행을 위해 모두 밖으로 나왔다.
그랑팔레에는 소유의 욕망으로 인한 부산스런 움직임들이 공허하게 흩어졌으며, 장소의 경험은 보물찾기의 승자를 부추기는 게임의 형식 하에서 상실되었다. 이 기획은 장소 경험의 희소성과 기대심리를 한껏 이용한 대형 갤러리의 비속한 마케팅 전략이자, 물질만능주의 사회의 욕망을 한껏 활용한 체험경제형 이벤트였을 뿐이다.
실종된 장소로부터, 경험의 장
한동안 동시대 미술에서 ‘경험’이란 말은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였다. 최근 몇 년간은 장소 특정적 경험을 전시장에서 되살리는 전시들이 유행병처럼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쇄도하는 경험으로의 요구는 작품과 전시, 관람객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큐레이팅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도전적 사고와 실천을 요구해왔다. 장소의 공유가 어려워진 현시점에서도 예술은 시간과 장소를 함께 큐레이팅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전시 경험을 모색해 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앞서 소개했듯 <WANTED>와 같이 새로이 시도되는 경험의 장은 장소성을 소비하기 급급한 미술계의 한 면모를 여과 없이 노출한다. 장소 상실을 플랫폼 삼아 이러한 상황을 사유화하고 자본화하려는 시도는 물리적/비물리적 장소뿐만 아니라 일상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장소의 위기와 부재가 새로운 장소의 등장을 요청해오고 있다면, 예술은 그러한 장소의 부재에 대해 어떠한 경험의 장으로 응답할 것인가?
글쓴이 심소미는 독립큐레이터로, 도시문화에 대한 비판적 개입으로서 전시와 공공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연구 및 비평 활동을 해오고 있다. 주요 기획으로 <리얼-리얼시티>(2019), <환상벨트>(2018), <서브토피아>(2017), <마이크로시티랩> (2016) 등이 있다. ‘제11회 이동석 전시기획상’을 받았으며, ‘2018 공공하는 예술’(경기문화재단)의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계간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WANTED> 전시 전경 그랑 팔레, 2020.10.24 사진: 심소미
Special feature No. 6
공공미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 이한빛 『헤럴드경제』 기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공공미술포털’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이른바 ‘1% 건축물 미술품’으로 더 익숙한 건축물 미술품, 즉 공공미술품이 어디에 어떤 작품이 설치됐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포털에 따르면, 서울지역에만 이미 3,491개의 건축물 미술 작품이 있다.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표시된 곳을 누르면 설치된 작품의 모습과 설치 연도 및 작가를 확인할 수 있다. 갑자기 ‘공공미술’이 이슈다. 하나의 작품을 놓고 ‘조형물이냐 조흉물이냐’하는 논란이 아니다. 코로나19로 문화예술계가 급격하게 움츠러들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어려움에 처한 예술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 주민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겠다며 꺼내든 지원안 ‘공공미술 프로젝트’ 때문이다.
3차 추경예산 통과로 문체부(759억 원)와 지방자치단체 예산(179억 원)을 합해 총 948억 원 규모로 사업이 시작됐다. 문체부 3차 추경예산안 중 가장 큰 규모다. 지난 7월 전국 228개 지자체별로 안내서가 배포되고, 8월 말부터 공모가 시작됐다. 사업 기한은 내년 2월까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졸속’이라는 비난이 비등하고 있다. 사업기한이 6개월로 짧고, 공모 과정과 정산 기한을 제하면 실제 작업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가량에 불과하다. 심지어 재공모하는 지자체도 있어 이 경우 내년 2월까지 마무리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도 나오고 있다. 우려가 제기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주민의 수요 등을 무시한 조악한 조형물이 범람하는 것 아니냐는 점, 다른 하나는 ‘일자리 창출’에 매몰돼 고용 수치를 높이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의 핵심 과제인 ‘일자리 창출’이 문화예술계에도 그대로 적용돼 나타나는 부작용도 상당하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보면 “대학교수, 직장인, 대학생은 참여가 제한되며 최종 사업자로 선정될 시 반드시 고용보험 미가입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인원을 고용보험에 가입시키고 이를 ‘고용 수치’로 잡겠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하자 조건에 부합하는 작가의 이름만 빌려 지원하려는 꼼수도 나타났다. 문체부는 이 같은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수많은 꼼수가 나타나는 것을 제도가 100% 막아낼 순 없다.
이쯤 되면,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원래 목적과 취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된다.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운 문화예술인을 지원하는 것이 오로지 공공미술 프로젝트밖에 없는 것일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오랜 구호가 2020년에도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많은 예술인이 지적하듯 작품을 사 주거나, 기존 시스템을 활용한 간접지원은 난망한 것일까. 정책 목표와 현실의 괴리는 그저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잡음’에 불과한 것일까. 도시 곳곳에 빼곡히 들어선 ‘공공미술품’을 지나다니며 드는 양가적 감정은 오로지 관람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건축물 조형물에 늘 따라다니는 이슈도 제기하고 싶다. 무엇이 들어서도 좋으니 제발 ‘조흉물’만 아니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시스템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돼 버린 것일까. 미술계에서는 ‘조형물 수명=건물 수명’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법령상에선 조형물의 이전이나 폐기가 자유롭지 못하다. 건물의 부속품으로 인식되기에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사이 주변 환경 변화로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 되어버린다거나,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방치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 해도 딱히 해결방법은 없다. 대안으로는 ‘조형물 자유거래’가 꼽힌다. 만약 조형물 설치 후에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세금처럼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돈이니까, 적당한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에서 시간이 지나 가격이 오를만한 작품을 찾는 것으로 바뀔 테다. 당장 시장에서의 과열이 걱정된다면 수명 연한을 10년 내지는 15년으로 정해놓으면 된다. 시장에 끌려다니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지만, 시장의 지혜를 활용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쓴이 이한빛은 『헤럴드경제』 신문에서 시각예술 분야 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해당 분야 기사를 생산하고 있지만, 엄연히 미술계 머글(비전공자)이다. 일반인의 눈으로 미술계 소식을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학부에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으며 뒤늦게 MBA과정을 밟고 있다. 시장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시장주의자다.
공공미술포털 홈페이지 스크린샷
Special feature No. 7
미술계 판로의 지각변동과 온라인 판매 저변 확대,
일시적 현상인가 지속될 미래인가?
● 손엠마 리만머핀 수석 디렉터
최근 ‘아트부산 & 디자인 2020’에 다녀왔다. 올해 상반기 1월에 다녀온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아트페어’와 2월에 다녀온 ‘프리즈 LA(Frieze LA)’ 이후 첫 대면 페어의 참여가 된 셈이다. LA 출장을 다녀온 2월 말경에 확산되기 시작한 코로나19는 이후 예정되었던 ‘아트 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을 선두로 모든 굵직한 페어들을 ‘온라인 뷰잉룸’으로 대체해 진행되도록 미술 판을 바꾸었다. 그 후 첫 대면 페어에 참여한 것이라 현장에서 느끼는 에너지를 다시 한번 경험할 수 있음에 즐거웠고, 당연히 여겼던 경험들이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 기회였다.
페어장에서 만난 얼굴들은 오랜만의 아트페어로 한결같이 설레는 표정이었다. 안전을 위해 지난해에 비해 축소된 규모로 진행되었던 ‘아트부산 & 디자인 2020’은 별도의 오프닝 리셉션이나 파티 없이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예년 같았으면 다음 페어장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을 갤러리스트들도 이번에는 그 인사만큼은 나누지 않았다. 다음 페어가 언제 열릴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 아트페어는 전 세계의 갤러리, 컬렉터, 작가, 큐레이터, 크리틱, 그리고 언론이 한자리에 모여 미술의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와 전략에 대해 제언하며, 서로 간 네트워크를 견고히하는 미술시장의 축제이다. 해당 도시 혹은 국가에 아트페어가 열리는 시즌에 그 지역에 거점을 둔 갤러리들은 전 세계 컬렉터를 위한 블루칩 작가의 전시를 준비해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도록 전략을 짠다. 페어장에서는 갤러리 공간을 방문하도록, 갤러리에서는 페어장의 갤러리 부스로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3월부터 중요한 페어들이 모두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이와 동시에 그동안 페어와 전시를 중심축으로 한 갤러리 운영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오프라인 전시가 불가피해지자 모두들 그 새로운 탈출구를 온라인에서 찾았다.
물리적인 장의 문이 좁아지자 온라인 뷰잉룸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부각된 것이다. 기존에도 온라인으로 작품의 이미지와 캡션을 확인하고 구매 문의를 할 수 있는 창구는 있었다. 대표적으로 아트시(Artsy)가 그 예이다. 또, 볼틱(Vortic)과 이젤(Eazel) 같이, 전시공간을 입체적으로 촬영해 방문하지 않고도 마치 전시장에 온 경험을 선사하는 새로운 전시 서비스 앱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뿐만 아니라 갤러리들은 각자 주체가 되어 온라인 뷰잉룸이나 전시 프로그램을 즉각적으로 만들어, 기본의 대면 전시 외에 온라인 프로그램을 따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제 온라인 플랫폼은 전시의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실제 전시만큼 중요해졌다.
9월 20일 아트시 뉴스에 실린 한 기사에 따르면 2019년 10%밖에 차지하지 않았던 갤러리의 온라인 판매율이 2020년 상반기에만 37%로 상승했다. 오프라인 페어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손님을 만나기 어려웠던 갤러리들은 온라인 판매를 통해 새로운 고객들을 접하고 있다. 이런 발표 자료들을 보면 올 한 해 온라인 판매에 대한 의존도는 확실히 늘었고, 또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미술시장은 작품을 직접 보고 소통하는 전통적인 소비 방식이 항상 중요한 큰 부분을 차지해온 특별한 시장이다.
그런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난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상하이에서 열렸던 ‘웨스트 번드(West Bund)’와 ‘아트021(ART021)’ 두 개의 국제 아트페어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곳의 열기는 과히 폭발적이었다. 상상하기 어려웠던 방문객들의 늘어선 입장을 위한 줄과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판매실적.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오프라인 페어에 목말라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여러 가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던 2020년을 돌아보며, 전 세계 미술시장에도 적지 않은 지각변동이 일었고, 온라인 판매 시장의 성장이 그중 가장 드러나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런 현상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잡힌 이후에도 계속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팬데믹 상황 속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일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글쓴이 손엠마는 미국 파슨스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에서 장식미술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수년간의 국제 경험을 토대로 국제갤러리 부디렉터(2002-2007)를 거쳐 청담동에 위치한 갤러리 엠을 2007년 설립하였다. 현재는 뉴욕, 홍콩, 서울 그리고 런던에 전시공간을 둔 리만머핀의 수석 디렉터로 재직 중이다. 전시기획, 작품 거래 및 작가 발굴에 힘쓰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 <Untitled #4 (Swamps)> 2019 pigment print Print: 40×60in
(101.6×152.4cm) Framed: 41×60.875×2in (104.1×154.6×5.1cm) Edition 3 of 5 with 2 AP signature label included
© the artist and Regen Projects, Los Angeles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Special feature No. 8
진화하는 예술생태계의 단서 하나, 온라인 뷰잉룸
● 김나형 디스위켄드룸 대표
2020년 3월, 코로나19 확산으로 ‘아트 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이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이후 ‘프리즈(Frieze)’, ‘테파프(TEFAF)’ 등 굵직한 해외 페어들이 잇따라 온라인 뷰잉룸을 출시하자 ‘키아프(KIAF)’를 비롯해 국내 미술계 곳곳에도 온라인 뷰잉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팬데믹 상황에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열풍처럼 불고 있는 ‘온라인 뷰잉룸’, 그러나 이 외래어의 정의는 아직까지 명확지 않다. 그래서일까?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온라인 뷰잉룸에 대한 개념과 이해, 지속 가능성에 대해 의견과 전망은 매우 분분하다.
뉴욕의 3대 화랑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는 온라인 뷰잉룸을 최초로 도입한 상업 갤러리이다. 1990년대부터 갤러리에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하고, 2009년 경제 위기 시절에 온라인 전자 상거래 플랫폼에 눈을 돌려 갤러리의 영역 확장을 꾀한 즈워너는 몇 차례 시도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17년부터 ‘작은 규모지만 관람객과 매우 편안하게 상호작용하는 온라인 전시’를 목표로 뷰잉룸을 선보이기 시작, 지금까지 약 60여 편을 기획해 발표했다.
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학술 및 시청각 기록 자료를 활용하는 즈워너의 뷰잉룸은 현재 ‘Studio’, ‘Exceptional Works’, ‘Offsite’, ‘Platform’ 등의 시리즈를 발표했으며, 코로나19 이후 주요 갤러리 지점이 폐쇄되자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뷰잉룸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 이 가운데 예술가의 작업실을 콘셉트로 제작한 ‘Studio’ 시리즈는 최근까지 제프 쿤스(Jeff Koons), 레이몬드 페티본(Raymond Pettibon), 수잔 프레콘(Suzan Frecon) 등 소속 작가들의 신작을 신속히 소개하는 7편의 에디션을 기획해 글로벌 폐쇄 기간에 모두 매진을 기록, 총 1,700만 달러(한화 약 189억 4,820만 원)가 넘는 인상적인 판매실적을 내기도 했다.
즈워너의 온라인 영업이사 엘레나 소볼레바(Elena Soboleva)는 아트시(Artsy)에서 수년간 스페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활동하다 2018년에 즈워너로 이적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을 오래된 유물로 취급하고, 갤러리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예술 산업 전체를 하이브리드 개념의 구조로 통찰한 즈워너의 전략으로 영입된 인물이다. 그는 올해 진행된 어느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온라인 뷰잉룸이란 작품 판매를 위해 멋지게 꾸민 갤러리의 웹사이트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온라인 공간을 갤러리 전체 운영 전략의 핵심 요소로 삼아 PDF, JPEG를 통해 정기적으로 작품을 판매해왔다. 이 과정에서 온라인 뷰잉룸은 자연스럽게 진화했다. 뷰잉룸은 단순히 JPEG와 인용문을 하나의 페이지에 올리는 것이 아니다. 갤러리 공간에서 기획하는 전시와 동일한 과정을 통해 전문 큐레토리얼 팀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결과물이며, 단지 갤러리 공간이 아닌 웹사이트에 최종 발표될 뿐이다.” 실제 즈워너의 뷰잉룸은 초대형 갤러리가 보유한 고유의 리소스를 기반으로 막강한 기술, 마케팅, 리더십이 합작해 스스로 진화를 거듭한, 뉴욕, 런던, 파리, 홍콩에 이어 디지털 공간에 문을 연 ‘일곱 번째 갤러리’ 매장과 다름없다. 그들은 컬렉터들의 진입 장벽이 낮고 매우 친절하기까지 한 이 신규 매장에 큰 자부심을 드러내며 통합적인 혁신과 실험을 거듭한다.
마찬가지로 2018년부터 가격 투명성과 공격적인 세일즈를 강화해 높은 수익을 거두고 있는 가고시안(Gagosian) 갤러리의 전용 뷰잉룸 역시 오랜 기간 빅데이터와 머신러닝 기술을 도입해 자체적인 프로토콜을 구축한 미술품 온라인 상거래 플랫폼으로, 새롭게 유입된 컬렉터 층이 원하는 다양한 정보들(가격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 주변 관계망, 미술사적 의의 등)을 양질의 콘텐츠와 세련된 방식으로 제공하면서 전 세계 주요 미술 기관 및 기업, 밀레니얼 세대를 흡수하는 강력한 포털로 작용하고 있다. 적어도 그들에게 온라인 뷰잉룸은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새로운 서비스 방식이 아닌, 콘텐츠 경쟁 시대를 예견해 오래 전부터 설계한 고도의 커뮤니케이션과 판매 전략인 셈이다. 오늘날 슈퍼 갤러리들이 선보이는 뷰잉룸은 그들이 바꾸고 있는 미술시장의 지형과 눈에 띄게 변화하는 젊은 컬렉터들의 입지를 체감할 수 있는 단서인 동시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글로벌 양극화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020년 하반기, 아트 바젤과 금융그룹 UBS가 발표한 보고서 「코로나19가 갤러리 분야에 미치는 영향」에서 온라인 뷰잉룸의 뜻이 모호하고 마케팅에 한해서만 유용할 것으로 지적한 딜러는 일부에 불과했다. 반면 컬렉터들이 겪은 디지털 경험은 매우 중독성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코로나19 이후에도 디지털 경험을 수용할 확률이 높고 팬데믹 상황 이전과 달라진 것 없이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는 젊은 밀레니얼 세대 컬렉터 층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설문에 참여한 컬렉터 중 3분의 1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아트페어 온라인 뷰잉룸과 기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미술품을 구입했으며, 이 중 32%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직접 구매한 경험도 밝혔다. 그리고 많은 딜러들은 VR, AR 등의 첨단 기술이 향후 전시와 판매를 증진시키는데 더욱 유용해질 것으로 예측했다.
불과 수개월 사이,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진 사용자들은 점점 더 빠르고 정교하며 풍성한 콘텐츠로 무장한 온라인 뷰잉룸을 원하고 있다. 성급히 ‘Inquire’ 버튼을 유도하거나 단순히 전자 상거래 시스템을 삽입한 일차원적인 뷰잉룸에 대해서는 벌써 지루함을 호소하며 기피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니즈의 변화는 경기 침체와 코로나19로 위축된 국내 미술시장 관계자들에게 다소 볼멘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콘텐츠가 담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스토리텔링에 몰입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각자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고, 액수와 상관없이 점점 더 쉽고 과감하게 구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적 컬렉터가 늘어나는 요즘, 바야흐로 콘텐츠 경쟁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온라인 뷰잉룸을, 그리고 미술시장 본질에 대한 성찰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은 오래전부터 이미 새로운 표준(The New Norm)이 되었다. 물론 미술 산업은 다른 분야에 비해 전통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그러나 오프라인과 온라인 플랫폼 간의 상호작용, 분야 간의 융합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빨라진 지금, 당장 시대가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 중 하나로 미술계에서 온라인 뷰잉룸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플랫폼에 최적화된 콘텐츠는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또 생소한 용어로 미술계에 등장할 것이다. 소통의 기술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더 빠르게 진화할 것이며, 가상 플랫폼을 이용한 쇼와 거래는 이미 수년간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활발히 진행될 것이다. 진화하는 예술생태계의 수많은 단서를 입체적으로 분석해 변화를 예측하는 일, 지금 미술잡지가 다뤄야 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쓴이 김나형은 디스위켄드룸의 대표이며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공공디자인 사업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게임개발자, 디자이너, 미술작가, 큐레이터 등과 함께 다양한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동시대 시각예술이 일상의 접점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방식을 연구해왔다. 주요 참여 프로젝트로 ‘우리가족플레이연구소’, ‘문화로행복한공간만들기’, ‘리센트워크갤러리’ 등이 있다.
303 Gallery 온라인 뷰잉룸 스크린샷
Special feature No. 9
공공적 소비
● 김지하 ACC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미술학 박사
작가들은 언제나 자신의 작품을 공개할 플랫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기존의 예술 플랫폼은 진입 장벽이 높고, 물리적으로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역설적이게도 감염병의 시대가 되니, 높아보였던 장벽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술 전시와 작품을 위해 굳이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특정 플랫폼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물리적 장소로서 미술관이나 영화관의 지위가 약화되지는 않겠지만, 가상공간이 상호보완적이거나 상호배타적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훨씬 빠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예술계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작가-기획자-관람객의 관계를 생산-유통-관람이라는 시스템에서 다시 점검해야 한다. 특히 요즘 더욱 주목하고 있는 관람환경의 문제가 아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유통변화와 생산자 위치에 있는 작가들의 입장에서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짚어봐야 할 것이다.
감염된 세계와 메타 이미지들
코로나19가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물리적 ‘장소성’과 ‘현장성’을 기본적으로 중시해온 예술계에도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사실 ‘말하지 마세요’, ‘만지지 마세요’, ‘일정한 간격 거리두기’는 코로나19 이전부터 미술관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던 용어였다. 숭고한 작품을 오염시키는 자가 있는지 감별하고, 관람객은 혹시나 나로 오해받지 않을까 긴장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감염병 시대가 오니 미술관들이 매우 친절해졌다.
기획자들이 직접 나와 작품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버츄얼 3D 공간을 통해 전시를 해부하며, 심지어 보물처럼 숨겨뒀던 소장품까지 꺼내어 사적인 공간으로 찾아왔다. 전시관의 큐레이션은 기획자가 주제를 정해 관련된 작품을 선정하고, 공간적으로 구획, 배치하여 관람객들에게 선보이는 행위의 일종이다. 인터넷 플랫폼에서는 관람객이 주도적으로 정보들을 취사선택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의 백업 정보 중 하나로 소비하게 된다. 따라서 큐레이션의 범위도 어떤 작품을 디지털화하고, 어떻게 조합하여 공개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의 유통과 아카이브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한편 코로나19 상황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가상전시 활동들을 보면, 지리적 여건 등으로 접근이 제한되었던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이 새로운 관람객으로 유입되고는 있지만, 가상전시가 작품의 유통이나 물리적 관람객의 모빌리티를 증가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현재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가상전시 활동이 실물의 이동을 증가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적 고려가 필요하다. 이는 아카이브와 유통에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것으로, 해외의 실물작품을 설치하거나 블록버스터 전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수집된 작품들, 그리고 저작권에서 좀 더 수월한 커미션 작품들의 보유와 활용 척도가 전시의 완성도를 높이게 된다. 또한 전시 주체가 작품의 활용범위를 어디까지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미술보다 일찍이 앞서있다. 영화에서는 이미 독립배급사 외에도 영화제, 시네마테크 등에서 작품들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하고 수집하며 유통시켜왔다.
물론 작품의 부피가 작고 대부분 디지털 파일로 전환된 것이 최대 장점이겠지만, 전시공간에 동영상의 비중이 커지고 온라인에서 보여줄 수 있는 포맷이 결국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본다면 미술은 영화의 유통체계를 참고하고 영화는 미술에서 보여주는 작품의 다각적 전시방식을 활용해볼 수 있다. 현재 작가와 기획자들은 가상공간에 놓인 가상 이미지들의 가치를 어떻게 위치 짓고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는지가 최대 고민일 것이다. 즉 폐쇄성에서 가치를 더욱 드러냈던 작품의 본질, 예술적 소비의 정당성을 어떻게 새로이 정의해야 하는지가 논의되어야 한다. 막연한 희망론이 아닌 현실적이고 반성적으로 말이다.
작가 친화적 예술행정의 필요성
작품의 새로운 소비 방식과 더불어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작가들의 작품제작지원 사업이다. 작품제작지원 사업은 분야도 다양해지고 운영기관도 늘어나고 있으며, 대부분의 목적은 작가들의 창작 독려, 제작환경 개선, 예술인 복지 등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지원받고자 하는 이들은 기관마다 요구하는 각종 서류를 준비하고, 경우에 따라 성공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발표, 비즈니스, 행정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대기업의 제작이나 투자가 들어가기 힘든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경우 영화제나 공공기관의 기금을 받기 위해 피칭발표를 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어떤 교육기관의 경우는 제작지원을 잘 받기 위한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커미션을 포함한 제작지원 사업 등은 예산이 많든 적든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작가들이 지원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한계에 대한 검토는 부족한 채 각종 지원사업의 정보들만 쏟아지고 있다. 특히 공적 예산을 운용하는 기관들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의 모든 활동을 당연한 노동으로 인식하고, 기관의 의지와 규범에 따라 실행하게끔 강제하는 과도한 계약서 조건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필자 역시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고, 제작지원 사업도 담당하면서 정부 정책, 기관체제의 논리를 핑계로 어떤 저항도 없이 많은 부분 관습화해버린 것이 사실이다. 지원사업이 창작을 독려하는 것이라면 특정 작가들만이 아닌 여러 작가를 대상으로, 다양한 분야와 지원방식이 마련되어야 한다. 작품 제작은 작가 개인의 고유한 능력과 창의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지원사업의 목적이 아무리 좋더라도 작가를 제조업자처럼 보고 물품 구매하듯 ‘OOO제작지원’이라는 크레딧 한 줄과 정산으로 작품의 책임을 끝내는 사업은 실패나 다름없다. 코로나 상황 이후 더욱 쏟아지는 지원정책들이 과연 어떠한 성과로 나타나고 있는지 중간점검이 필요할 때다.
글쓴이 김지하는 일본 타마미술대학교 및 연세대 영상대학원을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에서 미술학 박사를 취득했다. 매사추세츠 대학교 연구원을 지냈으며, 여러 대학에서 실험영화와 매체 미학 강의를 해왔다.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이사와 일본 이미지포럼 페스티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등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시네마테크에서 프로그램 기획과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를 맡고 있으며 토론토, 로테르담 등의 국제영화제와 해외미술관에 아시아 영상작품들을 배급하고 있다. 저서로는 『차학경 예술론』이 있고, 아다치 마사오(Adachi Masao)와 차학경 아카이브 관련 책을 준비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스크린샷
Special feature No. 10
2021 미술,잡지의 블레이드 이슈
● 이예승 작가
2020년 11월 현재, 코로나19는 다시 확산되고 있다. 모두가 예측하듯 2021년 역시 팬데믹 현상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이 혼란과 뉴노멀의 시대 미술 전문잡지는 무엇을 논해야 하나? 2021년 이후 우리가 주목할 키워드는 무엇일까?
1. 언택트 시대의 예술
a: 코로나19에 의한 언택트 현상은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최근 전시의 형태가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혹은 대면-비대면 혼합형으로 전환되고 있으나, 우리 미술계의 대응 방식은 보수적이다. 전시를 비대면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실제의 작품을 디지털화하고 이를 온라인으로 감상하는 것 이상의 문제이다. 이것은 그동안의 전통적인 예술생산과 예술유통 그리고 감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대면 중심의 예술에서 비대면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술생산- 유통-감상-비평-소유의 전 과정에서 비대면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술전문 잡지 역시 비대면화에 집중해야 하는데, 일례로 예술교육과 예술정책에 있어서도 비대면화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고 이에 대한 매거진의 집중적인 정보와 의견이 필요한 때다.
b: 이와 관계하여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논의한 ‘예술작품의 아우라(aura)’가 언택트 시대의 예술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디지털과 뉴미디어로 제작, 향유, 유통, 소유, 감상되는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는 어떻게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가? 우리는 ‘결과’를 소유하기 위해 예술을 향유하는가? 아니면 ‘과정’을 경험하기 위해 예술을 향유하는가? 언택트 시대에서는 어떤 것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또한 언택트적 예술 경험에는 어떠한 아우라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2.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동시대성(contemporariness)’에 대한 재검토와 한국예술의 새로운 시작
a: 과연 동시대성이란 것이 유효한가? 동시대성은 서구에서 강요한 시대적, 시간적 관념이다. 지난 10년간 세계 판도의 변화(아시아의 강세와 영미/유럽의 몰락)와 이번 언택트 현상으로 인해 공고했던 예술세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특이점(sigularity)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새로운 예술세계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K-Pop뿐 아니라 미술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세계의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서구세계가 정의한 ‘동시대성’에 대한 강한 의문과 반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예술이 ‘동시대 예술’의 정의와 전략을 답습해야 하는지, 아니면 ‘동시대성’의 개념을 기각하고, 우리 예술 나름의 시간과 시대 개념을 이번 언택트 현상을 통해 재조명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서구의 최신 물리학이 발견한 것은 고정되고 닫힌 시공간개념이 아닌, 다양성을 가진 열린 시공간이다. 양자역학 등이 발견한 다중우주론(Multiverse)은 정해지지 않은 세계(시공간 혹은 동시대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구의 ‘동시대성’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지표인가?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따라서 본 작가는 「퍼블릭아트」가 우리 예술계가 어떻게 하면 이 서구의 ‘동시대성’을 종언하고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열 수 있는지에 대한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b: 이와 관계하여 동시대성 극복을 위한 아시아예술과 동양미학의 재조명이 필수적이다. 이른바 동양화론은 이미 그 자체로 다중시점, 다중시간, 다중공간을 고민해왔다. 또한 동양철학은 양자역학 등의 최신 물리학의 개념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21세기 한국은 이러한 서양과 동양의 최접점 지대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철학과 미학, 그리고 예술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
3. 비접촉에 의한 가상적 대면을 바탕으로 한 예술
(빅데이터, 인공지능, 그리고 가상 그리고 증강현실 기반의 예술)
a: 언택트 예술은 곧 기계(미디어)와 매개된 예술이 필수적이다. 이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기존 예술세계에 더욱 깊숙이 침투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며, 창작 감상과 유통 등 예술의 전 과정에 데이터와 지능을 탑재한 기계의 유사창의성(pseudo-creativity)이 개입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기계의 협업이 만든 예술은 과연 예술인가? 이 시대의 예술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b: 이와 관계하여, 언택트 시대의 비접촉에 의한 가상적 대면 예술에 대한 논의도 필수적이다. 이른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은 현실에서 데이터를 추출하고 인공지능을 통해 보강 · 심화시킨 정보를 현실에 병치, 합성함으로써, 현실에 접촉하지 않고도 현실을 초월하는 또 다른 초현실을 제공한다. 언택트 현상은 이러한 비접촉성의 경험을 촉발할 것이며 사실상 근미래에는 증강/가상현실에 의한 창작과 경험이 하나의 사회적 문화로 또한 사회적 문해력으로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예술창작과 경험에 있어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에 의한 확장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4. 자연-생태-환경을 고민하는 예술
a: 21세기 우리 세계는 자연-인간-기계가 융합해 파생한 2차 생태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 문명을 무분별하게 수입하여 자기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결과로 코로나19 뿐만 아니라, 지구온난화, 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 그리고 유전자조작과 핵발전에 의한 위협 등 자연과 인간은 기계를 매개로 반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가장 숭고한 인간적 행위로, 무질서에 질서를 구현하는 거룩한 행위로 인식되어왔지만, 인간의 또 다른 인위적 행위들은 무질서에서 ‘인간만을 위한 질서’를 구현함에 따라,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고 동시에 또 다른 무질서로 회귀하는 현상을 보인다. 본래 예술이 진리와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질서를 추구한다면, 언택트의 시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자연-인간-기계의 조화로운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가? 예술은 여기서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어떤 과정과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 자연-생태-환경과 조화할 수 있는 예술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할 때다.
글쓴이 이예승은 미디어 아티스트로 2018년 문화역서울 284 <개성공단>, 서울시립미술관 <디지털 프롬나드> 등 주요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최근 미디어아트 기관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와 현대 모터스튜디오와의 글로벌 협업 전시 프로젝트 ‘Human (un)limited’에서 기술 변혁기에 마주하는 현시기를 동양 신화적 상상력으로 표현한 <변수풍경>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시(2011)를 거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13-2014), 국립아시아문화전당(2016), ZER01NE(2019) 등에서 작업을 진행하였고, 현재 ZER01NE LAB(2020)에서 기술기반 시대의 다양한 미래 시나리오를 탐색 중이다.
<Contemporary Art and Walter Benjamin> Exhibition View © Jewish Museum
Special feature No. 11
타임 큐비즘
●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추진단장
그간 현대미술의 유미적 성지화와 투자적 자본화는 예술작품을 더욱더 인문 철학적 담론들로 포장하며 수사화 시키고 있다. 또한 텍스트가 범람하는 동시대 예술 전시들이 대부분 내용적인 개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필자가 2년 전 기획하였던 <타임 큐비즘>전은 단지 사유를 담는 도구로 여겨졌던 장치와 기술의 흔적들을 연구하는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eology)의 관점으로 기획한 전시였다. 기술 매체 연구가 사회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적 탐구의 영역임을 주장한 프레드릭 키틀러(Friedrich Kittler)이래 진화론적인 기술문화 연구에 대한 논의는 예술계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가 지칭한 ‘타임 큐비즘’은 디지털 기술 도구의 진화와 그 환경의 경험적 압력이 우리의 인지 감각을 어떻게 확장시키고 현대미술의 양상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추론할 수 있는 명제이다. 급속한 디지털 기술의 진화는 우리의 지각 양식 및 인식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편할 만큼 우리 삶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매체에서 비롯된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 그에 따른 공간과 시간의 인식 변화는 예전과 다른 미학적 의미를 생성하는 창작의 토양을 다져놓았고, 그 위에 펼쳐진 예술의 지형에도 본질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는 비단 동시대 미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은 시공간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표현방식을 이뤄냈다. 당시의 모더니즘 미술은 단순히 예술적 사조 흐름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당대의 근본적인 세계인식의 변화, 과학 문명의 발달, 진화된 기술 매체의 등장과 연동된 새로운 시공간 개념이 반영된 결과였다. 인상주의를 기점으로 미래파, 입체파 등으로 이어지면서 원근법에 따른 절대적 단일 공간성과 뉴턴식의 전통적인 3차원 공간 개념에서 탈피하였으며 동시에 새로운 시지각적 표현의 가능성을 펼쳤다. 특히, 특권적 관점을 거부하고 모든 시점에 균등한 자격을 부여하여 다중시점으로 사물을 해체, 분해했다가 재구성하는 입체주의(Cubism)는 전복적 공간 개념이 투영된 대표적인 기계시대 예술의 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디지털 기술의 진보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특정 사건이나 상황의 과거, 현재, 미래란 선형적 시간을 파편화(破片化), 상보화(相補化), 순환화(循環化), 중의화((重義化) 융합화(融合化) 시키고 있다. 이제는 시간의 속도와 재현에 있어서 기술적 조작과 가공이 가능하고 기존의 시간성은 더욱 유연하게 구현되고 있다. 이제까지 경험하기 어려웠던 4차원적 시간의 지각이 더욱 용이하게 된 것이다. 정교하게 진화된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매체는 시간의 조작과 변형을 더욱 촉발하며 예술적 상상의 지평을 확장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영상예술 장르에 있어 기초적 단위인 프레임을 해체, 확장시키는 기술이 발전되며 단면을 넘어 다면적 프레임의 영상작업들을 출현하고 있다. 이에 다채널 영상의 프레임 수는 무한으로 증가하며 영상 장르에 있어 사각 프레임의 정의를 희석시키고 있다. 또한 다른 시공간대의 영상들을 연동, 동조시키는 기술이 발전하며 기존과는 다른 개념의 시간성이 창출되고 있다.
이는 영상작업에 있어서 보다 비선형적, 다층적 특징을 드러내게 하며 다차원적 화면구성으로 낯선 시공간적 체험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19세기 말 산업혁명 시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변화의 압력이 3차원의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지지각을 해체 · 재구성하고 미술사에서 ‘큐비즘’ 태동의 원인이 되었다면, 21세기 디지털 기술혁명의 환경적 압력은 4차원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지지각을 해체 · 재구성하며 현대미술계에서 ‘타임 큐비즘’ 태동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작가의 예를 들면 호주 출신의 안젤리카 메시티(Angelica Mesiti)는 영상작품인 <시민밴드(Citizens Band)>(2012)에서 다채널 연동 기술을 통해 4개의 Full HD 영상을 동조시키며 다른 시공에 존재하고 있는 이민자들의 삶을 한 시점, 한 지점으로 불러 모은다. 각기 다른 시공의 동시적 체험은 실제와 허상 사이에 강한 진폭과 진동을 만들어낸다.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에 출품된 리사 레이하나(Lisa Reihana)의 <금성을 찾아서(감염된)(In Pursuit of Venus(Infected))>(2015-2017)는 52:9 비율의 긴 파노라마의 영상화면을 구현하기 위해 4개의 Full HD 비디오 프로젝터의 동조기술이 사용된다. 과거 뉴질랜드 원주민에 대한 서구 외지인의 권력적 역사를 서사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비가시 콜라주라는 기술적 방법에 따라 하나의 긴 화면 안에서 다시 서사가 재분할, 재조립되며 관람객들에게 시간의 단선의 시간성의 얽힘을 감응케 한다.
동시대 많은 작가들은 다양하고 보다 진보된 영상 동조, 연동 기술을 활용하여 가상현실, 혼합현실 등의 작품을 창출하고 있으며 이 안에서 기존 선형의 시간을 비선형으로 확장, 조정, 조작한다. 과학의 발전은 고전역학, 상대성역학, 양자역학으로 나아가며 공간과 시간의 관계성을 확장시키고 있고 이제는 우주에 부유하는 모든 차원의 시공이 서로 연결되고 얽히며 하나의 소실점으로 융합되고 있다. 상업영화 장르에서도 시간을 다루는 SF영화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여행하는 ‘타임리프’ 영화에서 출발해 ‘타임루프’, ‘타임워프’ 개념으로 진화하며 이미 선형의 시간은 비선형의 시간과 뒤섞이게 됐다. 홍상수 감독의 2014년 영화 <자유의 언덕>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비선형적 경험을 제시한다.
“시간은 우리 몸이나 이 탁자 같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유의 언덕> 속 주인공 영선과 모리의 대화)
이제 인간의 틀 밖에서 흐르던 시간은 인간의 틀 안으로 들어와 양자적 얽힘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타임 큐비즘>은 동시대 디지털 기반의 영상미술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성이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는지 탐색하는 작업이다. 본 전시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흐르는 시간을 통해 다른 차원의 경험을 선사하며 우리의 지각과 심리의 변화, 사유의 흐름이 어떻게 촉발되고 대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타임 큐비즘>은 21세기 예술적 사조의 혁명을 알리는 전조의 하나로 의미 있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 광주시립미술관 <타임 큐비즘> 기획글 인용 발췌
글쓴이 서진석은 1999년 한국미술계 최초의 대안공간인 루프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한국의 수많은 젊은 작가를 발굴, 지원해 왔다. 다양한 국제 활동을 통해 아시아 미술인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2010년에는 <A3 아시아현대미술상>, 2011년부터 <아시아창작공간 네트워크>, 2014년부터는 <무브 온 아시아> 등을 기획해 아시아 작가들을 소개하고, 아시아 미술의 새로운 담론들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2001년 ‘티라나 비엔날레(Tirana Biennial)’, 2010년 ‘리버풀 비엔날레(Liverpool Biennial)’ 등 다수의 국제 비엔날레 기획에 참여했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을 역임하며 세계 여러 미술기관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한국미술의 글로벌화에 주력하고 있다.
<타임 큐비즘> 전시 전경
Special feature No. 12
코로나 시대, 공공미술관의 존립과 새로운 변형
● 최정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장
코로나 정국으로 모든 곳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 속에서 미술관도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미술관도 올해 들어 총 세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두 번의 휴관을 했고, 예산사정과 집객의 어려움으로 인해 올해 예정되어 있던 전시들을 내년으로 미루었으며, 교육 체험 프로그램과 이벤트 행사 등도 최소한만을 남겨두고 대부분 취소했다. 더 걱정스럽고 암울한 것은 상황이 내년에도 비슷할 것이며 그것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내년도에 지자체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사업 예산은 통상적인 해의 절반 수준이어서, 그동안 애써 키워왔던 여러 프로그램과 국제교류 사업들 대부분이 중단될 위기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사업 중단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더 큰 염려는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미술관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다. 지금과 같은 때, 공공미술관이 계속 존재해야 할 정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미술관이 추구해야 하는 정책 방향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것이 최근 필자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이며 전문가들과 미술잡지가 함께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아무래도 공공미술관 태동 당시 그것의 본래의 취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공공미술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미국의 근대적 미술관들이 설립 당시 공통적으로 내세웠던 정당성과 정책 방향은 ‘민주적 공공성’이었다. 그러나 19세기까지도 미술관에서 공중의 예술 향유와 참여는 사실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노력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철저하게 권력층 상부에서 아래로 하달되는(top-down)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순수하게 공중을 위한 것 혹은 공중에 의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론가들은 각국 미술관들의 진짜 목표는 정치, 사회적 필요성 하에 권력과 자본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며, 기득권들에 유리한 사상을 교육하고, 그들의 취향을 표준화함으로써 권력과 자본을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돔하우스 전시 전경
오히려 공중의 예술 향유와 참여를 위한 민주적 공공성의 싹은 프랑스 대혁명과 루브르 개관 직전의 살롱에서 움텄다. 당시 실로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공공적 영역인 살롱에서 모여, 전시된 작품을 매개로 정치와 정책에 관해, 철학적 쟁점들에 관해 그리고 미적 가치들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예술에 대한 문외한과 최하층민들까지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자, 곧 폭넓은 토론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근대적 미술관이 탄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모태가 되었고, 더 나아가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기여했다.
공공미술관이, 애초에 그것을 계획했던 계몽주의자들의 희망대로 민주적 공공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기능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절대 왕정에서와 같이 위로부터 하달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어리석거나 난폭할지라도 위로부터 하달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수많은 경쟁적 목소리와 검열되지 않는 대화를 수용하는 것이 민주적 공공성의 중요한 본질이다. 미술관에서 여러 공중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유도하는 정책과 전시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술관에서 예술이 자유로운 공공적 가치에 대한 대화의 원천이 되고 미술관이 관람자의 능동적인 참여와 자발적인 토론의 장이 될 때 미술관의 민주적 공공성은 성취될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활성화된 온라인 전시, 화상으로 참여하는 작가(큐레이터)와의 대화, 학술행사 등과 같은 방식은 공중의 참여와 함께 민주적 공공성을 더욱 폭넓게 확장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본다.
뮤지엄의 오랜 역사에서 살펴볼 때, 근대적 공공미술관은 이전의 뮤지엄 전통에서 ‘과시와 선전’, 그리고 ‘기억의 장소’라는 요소를 계승하고 있기는 하나 전혀 새로운 형태로 변형된 뮤지엄이다. 뮤지엄의 전통은 오랜 기원인 무세이온(Mouseion)으로부터 중세의 종교적 성골함과 대성당의 성구실, 15세기 르네상스의 스투디올로(Studiolo), 16-17세기의 캐비넷(Cabinet)과 쿤스트캄머(Kunstkammer) 등을 거쳐 근대적 공공미술관의 형태로 계속 변형되어왔다. 특히 근대적 미술관은 민주주의와 근대미학의 영향 하에 나타난, 그 이전의 뮤지엄으로부터의 급진적인 변형이며 그것의 주요 특징은 공공성과 순수예술에 대한 강조 등이다. 그런데 이제 코로나로 앞당겨진 비대면 온라인 전시 교육 체험, AR, VR, 인터랙션 등의 신기술이 접목된 가상공간의 전시 등은 또 다른 형태의 미술관으로의 변형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새로운 변형은 또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글쓴이 최정은은 현재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관장이다. 고려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과거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연구원, 『월간미술』 기자, 『아츠앤컬쳐』 편집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