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선로 근처에서 8mm 카메라로 영화를 촬영하던 6명의 아이가 끔찍한 사건을 목격한다. 그날 이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공격을 받게 되는 마을, 카메라에 담긴 진실을 토대로 알 수 없는 존재와 맞서기 시작하는 소년과 소녀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2011년에 개봉한 영화 <슈퍼 8(Super 8)>의 줄거리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OSCAR) 수상자 출신인 마이클 지아키노(Michael Giacchino)가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았는데, 주제곡 리스트 중 하나의 타이틀이 이번 전시 제목인 <Creature Comforts>다. 헤르난 바스가 이 곡을 염두에 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음악의 기승전결은 전시와 아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정작 동명의 회화 <Creature Comforts(cat city)>(2020)는 거대한 캣 타워에 올라 4마리의 고양이들 틈에 섞여 또 한 마리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소년을 그린 비교적 ‘귀여운’ 그림이라는 반전이 있긴 하지만.
데뷔 때부터 쾌속으로 성공 가도를 밟은 헤르난 바스는 이제 막 40대에 접어들었고 ‘루키’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다. 과거에 작가와의 대화 자리에서 그는 마이애미에서 태어나고, 플로리다에서 보낸 성장기를 밝히며 형과 누나들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외계인, 뱀파이어, 유령 관련 책들에 매료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초자연적인 현상들, 불가사의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단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에 끌렸던 것이다. 바깥에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바로 한 겹만 들추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장르처럼 작가 본인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하는 퀴어적인 것(queerness) 역시 이러한 감각과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헤르난 바스가 미술사, 문학, 영화 등을 인용한 이야기를 자신의 스타일로 그려낸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바스의 그림은 고전적이면서 동시대적이다. 어딘가에서 불쑥 솟아오른 생경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레퍼런스와 취향들이 버무려진 오늘날의 이미지들처럼 말이다.
<Creature Comforts (cat city)> 2020 274.3×213.4cm
© Silvia Ros, the artist and Perrotin
어린 시절부터 초자연적인 현상들, 불가사의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단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에 끌렸던 것이다. 바깥에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바로 한 겹만 들추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장르처럼 작가 본인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하는 퀴어적인 것(queerness) 역시 이러한 감각과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헤르난 바스가 미술사, 문학, 영화 등을 인용한 이야기를 자신의 스타일로 그려낸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바스의 그림은 고전적이면서 동시대적이다. 어딘가에서 불쑥 솟아오른 생경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레퍼런스와 취향들이 버무려진 오늘날의 이미지들처럼 말이다. 지나간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과 매력적인 인물들을 찾아내거나, 자신이 동경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인용해 재해석하면서도 자신만의 터치를 더해 ‘리믹스’하기. 독특함과 친숙함의 수위를 영리하게 조절하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일군의 작가들 중에서도 바스는 가장 빨리 성공했으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동시대의 감수성처럼 보편적인 요소와 문화적·지적 취향, 성 정체성 등 개인적 요소들이 물감이라는 전통적인 매체에 뒤섞여 특유의 매력적인 시각 이미지로 만들어낸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 역시 전작들과 연결고리는 명백하다. 다만 이번에는 이야기의 완성이라기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집약적으로 인물 소개를 하는 오프닝 버전에 가까운 것 같다. 어떤 면에선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이어지며 잔뜩 긴장한 채로 집중하게 하는 호러 무비의 짧은 예고편 같기도 하다. 아주 작은 그림부터 벽면을 꽉 채우는 대형 회화까지, 작가가 새로 선보인 그림에는 대체로 소년이 한 명씩 등장한다. 그들은 기이한 공간에 있지만 별다른 표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외려 대담하게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도 보인다.
<Three Vampires> 2020 182.9×152.4cm
© Silvia Ros, the artist and Perrotin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 바에는 지쳐 보이는 듯한 남자가 한쪽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앉아 있다. 맞은 편에 앉은 누군가 역시 한쪽 팔만 내놓고 있다. 그들 앞에 놓인 2개의 와인잔에는 조명보다 붉은 음료가 담겨있다. 음료의 정체는 무엇일까. 힌트는 그들 뒤로 놓인 냉장고 안에 있다. 술병 위의 라벨처럼 혈액형을 표기한 혈액 주머니가 ‘신선하게’ 보관되어 있다. <Three Vampires>(2020)라는 제목에서 뱀파이어가 셋이라고 명시한 이유는 바로 박쥐 한 마리가 남자 한 명의 팔에서 피를 빨고 있기 때문이다. 종(種)의 차이를 넘어선 흡혈 파티다. <The hot seat>(2020) 역시 전체적으로 붉은 톤을 주조로 한다. 천장에 걸린 나뭇가지에 꼬리를 감고 내려온 거대한 구렁이는 앉아있는 소년의 목을 감싼다. 유리로 된 사육장 안에는 어린 뱀들이 쉬고 있다. 뱀과 소년 사이엔 어떤 긴장도 흐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익숙함이나 편안함에 가깝다. 좀 더 친숙한 존재도 등장한다. 박쥐, 뱀, 고양이, 물고기가 소년과 교감하고, 나무에는 피주머니가 열매처럼 주렁주렁 열리기도 하고, 거대한 고깃덩어리에서 떨어질 살점을 먹으려고 기다리는 식물들이 있는 배경들이 수상쩍을 뿐이다. 캔버스 프레임에 갇힌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가 만들어내야 한다. 이번 전시의 서문을 쓴 오스만 캔 예레바칸(Osman Can Yerebakan)은 “그들은 위험과 시시덕거리고, 죽음과 왈츠를 추며 고통으로 옹기종기 모여든다(they flirt with danger, waltz with death, and huddle with pain)”고 표현한다.
<Emotional Support Animal (guardian angel)> 2020
76.2×55.9cm © Silvia Ros, the artist and Perrotin
투명한 봉지에 들어 있는 물고기는 <Emotional Support Animal (guardian angel)>(2020)에서 심지어 ‘수호천사’ 역할까지 맡는다. 건장한 금발의 청년이 쓸쓸하게 앉아 있고 그런 그의 목에는 물고기가 들어 있는 비닐이 걸려있다. 온갖 위험과 악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부적을 지니는 것처럼 작은 물고기는 그를 “감정적으로 지지하는 동물”이다. 그림 속 남자들은 소년에서 청년 사이 어디쯤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패션 화보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마르고 길고 창백한 얼굴로 취하는 무심한 포즈들. 그들이 내뿜는 쓸쓸한 분위기는 어딘가 자신들이 있는 곳 너머를 응시하는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번 신작의 주인공들은 피, 박쥐와 뱀, 식충식물, 늑대인간 같은 단서를 내놓으며 천연덕스럽게 군다. 정확한 시대나 순간을 특정해서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들의 등장과 함께 평범한 장소가 환영처럼 변하고 특별할 것 없는 행위들이 약간씩 뒤틀려 있다. 미스터리한 스릴러 영화가 우연히 어떤 한 장면에서 멈춰 그림이 된 것처럼. 환한 조명으로 밝힌 화이트큐브에 걸린 작품들엔 불안, 혼란, 공포가 있다. 평소 같았다면 오프닝 날 핼러윈(Halloween)을 테마로 파티를 열었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Nectar (or the hummingbird enthusiast)> 2020
182.9×152.4cm © Silvia Ros, the artist and Perrotin
달력은 바뀌었으나 시절은 아직도 수상하고 많은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모두의 주변에 기묘한 긴장과 두려움이 머문다. 그러므로 바스가 그린 13점의 회화를 팬데믹이나 봉쇄령의 여파와 연결 지어 이해하고 싶은 충동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작가가 초유의 사태에 성급하게 ‘반응’하기를 꺼리기는 하지만 작품은 창작자를 떠나는 순간 언제나 오해와 확대해석 등의 가능성을 품게 되므로, 이미지 위에 덧씌워지는 ‘상상적 혐의’들까지는 막을 길이 없다. 게다가 어른용 안심 담요(<Adult Security Blanket>(2020)), 난방기구(<The hot seat>(2020)), 안락한 소파처럼 ‘편안함’을 주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creature comforts’는 일상을 박탈당한 채 갇혀 2020년을 지내는 동안 사람들이 가장 갈구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니까. 물론 ‘예술’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PA
글쓴이 이가진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에드워드 루셰(Edward Ruscha)의 초기 아티스트북」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퍼블릭아트」 기자로 동시대 미술 신에 관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으며 예술과 텍스트라는 두 가지 영역에 관심을 두고, 그 사이를 잇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긴 호흡의 글을 쓰고자 한다. 현재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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