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수준의 이상 기후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호주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무려 6개월간 이어진 대형 산불로 우리나라 총면적에 달하는 막대한 산림이 소실되었고, 인명 피해는 물론 호주를 상징하는 캥거루와 코알라를 비롯해 약 10억 마리의 야생동물이 목숨을 잃었다. 올해 7월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까지 서부 지역에서 잇달아 화재들이 발생하는가 하면, ‘지구의 허파’ 아마존 열대우림에서도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누적 화재 수만 7만 6,000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올해는 아시아 지역에도 이상 기후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약 두 달 가까이 계속된 긴 장마에 이어, 세 차례의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고,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 남아시아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도 폭우와 홍수, 태풍의 피해가 잇따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극지방의 빙하는 녹아내리고, 사막처럼 말라버린 땅은 연신 불씨를 내뱉으며, 따뜻해진 바닷물을 타고 더 강력해진 태풍들이 몰려오고 있다. 세계 곳곳에 불어 닥친 기후 위기, 지역마다 현상은 다르지만, 사태의 본질은 같다. 지구가 메말라가고 있다.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 속에서 인간은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나. 이미 예술계에서는 1950년대부터 순수한 자연 현상과 생태계의 원리를 창작 모티브로 삼거나 혹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 가능성을 탐구하는 예술가들이 대거 등장하며, 환경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이른바, ‘생태학 예술(Ecological Art)’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Nicole Dextras <Mobile Garden Dress> 2011 photograph,
garment made from various plant materials © the artist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의 제안으로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가 독일 함부르크의 엘베강(Elbe) 정화를 위해 디자인한 설치작업 <잔디 산(Grass
Mount)>(1955)을 시작으로 ‘불확정적이며 역동적인 자연의 예술’을 주창한 한스 하케(Hans Haacke)가 뉴욕주 이타카(Ithaca)에서 선보인 <잔디 재배(Grass grows)>(1967-1969), 뉴욕의 대기·수질오염도의
심각성을 보여준 앨런 손피스트(Alan Sonfist)의 퍼포먼스 등을 들 수 있다. 초기 생태학 예술은 무엇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적 자연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과 순수성을 예술적 표현으로
승화시키거나 재구성하는 식의 심미적 성향이 강했으나, 1969년에 일어난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Santa Barbara) 기름유출 사고 현장을 촬영해 그 심각성을 세상에 알린 베티 보몬트(Betty Beaumont)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기점으로 ‘사회참여형’ 예술로서 영역을 넓힌다. 이처럼 생태학 예술의 계보는 ‘자연’에 대한 미적 탐구를 비롯해 시대마다 우리 사회가 직면했던
다양한 환경 문제들을 반영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다만, 21세기
생태학 예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역적·국지적 관점에서 다루어진 환경문제가 지구적·인류학적 차원의 이슈로 확대되었고, 여기에 더 나아가 적극적인 실천적
행위로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파리에 위치한 프랑스 전력청 재단(Espace Fondation EDF)에서는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의 실태와 생태학 예술의 현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녹색
흐름들, 환경을 위해 창작하기(Courants Verts, Créer
pour l’environnement)>전이 한참 진행 중이다. 생태학 예술 이론가인
폴 아르덴(Paul Ardenne)이 이번 전시의 큐레이팅을 맡았다.
그는 최근 펴낸 『생태학 예술, 조형적 그리고 인류세(人類世)적 창작(Un Art Écologique, Création
plasticienne et anthropocène)』(2018)에서 ‘환경 예술’, ‘에코 아트’ 등
환경(environmental)을 다루는 예술 사조들은 숱하게 많지만,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서 인식하고 정치적·사회적 행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21세기 생태학 예술’을 재정의한 바 있다. 아르덴이 제안하는 ‘환경을 위한 녹색 창작’이란 무엇인지 지금부터 들여다보자.
Sarah Trouche <Aral revival> 2020 performance
au Kazakhstan sur la mer d'Aral asséchée © the artist
‘경고하기(Avertir)’, ‘행동하기(Agir)’, ‘상상하기(Rêver)’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전시는 먼저 프랑스 작가, 사라 트루쉐(Sarah Trouche)의 강렬한 퍼포먼스 <아랄해의 회복(Aral Revival)>으로 시작된다. 인적 하나 없는 메마른 땅 어딘가, 온몸을 푸르게 물들인 그는 버려진 배 위에 올라가 자신의 몸보다 몇 배나 더 큰 국기를 힘차게 흔든다. 작가가 양손에 쥔 것은 맑은 하늘빛 바탕에 황금빛 태양과 독수리가 그려진 카자흐스탄 국기이고, 그가 서 있는 곳은 아랄해이다. 한때,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였던 아랄해는 1960년대 구소련 정부가 목화 재배를 위한 관개용수로 사용하면서 급속히 줄어들어 현재 90%가 사라진 상태다. 불과 50년 만에 사막이 된 호수. 작가가 바라는 것처럼 아랄호는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낳은 무분별한 환경 파괴는 이뿐만이 아니다.
캄보디아 작가, 후베이 삼낭(Khvay Samnang)은 산업화가 정점에 이른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대량의 고무를 채취·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무나무를 대규모로 심었던 땅을 찾았다. 울창했던 숲은 무참히 파괴되었고, 그 속에 살던 야생동물들과 새들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정체 모를 기이한 생명체들만이 즐비한 숲속에서 작가는 백색의 고무나무 수액을 자신의 몸에 쏟아 붓고는 본인 역시 잡종 생명체 <고무나무 인간(Rubber Man)>이 되어버린다. 마치 유령처럼 순식간에 육체가 하얗게 변해버리는 충격적이고 괴기스러운 퍼포먼스. 이것은 본연의 모습과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출한 것이자, 인간이 자연을 파멸한 대가는 결국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섬뜩한 경고이기도 하다. 환경 위기의 실태는 크리스티안 조프루아(Christiane Geoffroy)의 <대륙의 변동(La dérive des continents)> 작업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전시장 벽에 새파란 세계지도 하나를 그렸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 어색해 보이는 지도 속 세상, 마치 원통 투영법에 기초해 대륙의 면적이 왜곡되는 메르카토르(Mercator)의 세계지도처럼 실제보다 더 부풀어진 곳과 더 축소된 곳들이 보인다. 결코 작가의 실수는 아니다. 사실 조프루아의 지도는 단순히 지형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국가별 국내총생산(GDP)과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상관관계를 산출해 지도로 재구성한 결과이다. 지구상의 경계가 뒤바뀔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있다. 그러나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위해 2015년 개최된 유엔 당사국총회(COP21) 과정에서 보았듯,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입장은 극명하게 갈린다. 여전히 인류의 미래와 생존보다 자국의 경제 성장이 최우선시되는 까닭이다. 팽창과 수축 사이를 오가며 요동치는 세계지도, 그 속에서 우리는 환경문제가 국가 간의 파워 싸움으로 전락한 암울한 현실을 마주한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
Lucy et Jorge Orta <Symphony for absent wildlife>
© David Bickerstaff
요제프 보이스는 1982년 열린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에서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Fridericianum) 앞에 떡갈나무 묘목 한 그루를 심고, 그 옆에 1.2m 길이의 현무암 기둥을 세웠다. 뒤이어 떡갈나무를 심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현무암 조각 6,999개를 더 쌓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급격하게 추진된 산업화의 여파로 산성비와 화약 물질에 의한 오염이 급증했던 때다. 나무 몇 천 그루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할 리 없다. 그러나 대중과 함께 소생과 재생의 과정을 행하여 ‘사회적 유기체’를 이끌어내겠다는 굳은 신념 아래 작가는 ‘7,000그루의 떡갈나무(7,000 Eichen)’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리고 그의 바람처럼 카셀 시민들은 하나둘씩 나무 심기 운동에 동참했고 5년 후, 제8회 도쿠멘타 오프닝에서 7,000번째 나무가 심어졌다. 이후, 보이스가 심었던 첫 번째 나무는 성장해 <보이스의 도토리들(Beuys Acorns)>이라 불리는 250개의 묘목을 탄생시켰고,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카셀의 대로변에는 울창한 떡갈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는 큐레이터 아르덴이 주장한 대중의 정치적·사회적 실천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례로서 생태학 예술과 공공 예술의 효시로 손꼽힌다. 이와 같은 대중 참여형 프로젝트는 지금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다.
티에리 부토니에(Thierry
Boutonnier)는 프랑스 파리를 포함한 수도권 지역의 대기를 정화하기 위한 프로젝트 ‘통풍(Appel d’air)’의 일환으로 <숲 찾기(Recherche Forêt)>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폐쇄된 공장이나 버려진 건물, 황무지와 같은 척박한 땅에서 솟아난 새싹들을 채집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
시민들과 함께 길러낸다. 죽은 땅이라고 치부되는 곳들에서 용케도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존멸의 갈림길에 놓인 자연과 생태계, 물리적인 원인은 분명 환경
오염이지만 그 역시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비극이며, 손쓸 수 없을 지경까지 망가져 버리도록 방관한 우리의
무지와 무의식, 그리고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가
세상의 수많은 새싹 중에서 가장 취약하고 악조건에서 자라난 싹을 굳이 찾아내 살려낸 이유다. 요제프
보이스는 1982년 당시 떡갈나무를 심으며 “나무는 생명체로서
변화를 거듭하지만 그 옆에 세워진 돌조각은 불변한다”고 말한 바 있다.
7,000그루의 떡갈나무와 보이스의 정신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애당초 현무암 돌기둥은
망각하는 인간을 위한 장치로 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마음속 깊이 돌기둥을 새겨야 할 때다. PA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미술과 뉴미디어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 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 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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