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스스로를 작중 화자로 내세우는 소설가처럼 어쩌면 아이젠만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예술가의 분신일 수도 있다. 그는 정치, 역사, 사회적 이슈는 물론 사적인 생활과 그것을 겪으며 자신을 관통하는 감정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명료한 표현의 이면에는 은밀한 상징들이 스며들어 있다. 작가는 르네상스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의 레퍼런스를 자유롭게 끌어온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을 차용하거나 그것에 저항하기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외려 비평적 책 읽기를 실천하는 독자처럼 기존의 내용에 자신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변환시키는 일에 가깝다.
이미 규정지어진 역사 속에 나의 자리가 없다면, 내 자신이 만들어내겠다는 자세에 비유할 수 있을까. 미국 뉴욕 뉴뮤지엄(New Museum)의 아티스틱 디렉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는 “아이젠만은 미술사 앞에서 수동적으로
무릎 꿇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부활시켜 우리의 현재로 위장한다(She
doesn’t passively genuflect in front of art history; she resurrects it and
camouflages it into our present)”고 표현한 바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거나 ‘같은 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명제가 떠오른다. 인간의 일들은 반복되고, 그것을 경험하거나 인식하는 개개인에 따라 해석의 길이 달라진다. 많은
예술가들이 과거의 유산을 현재로 소환해 재창조하는 이유다.
<Tis but a scratch’ ’A scratch?! Your arm’s off!’ ’No, it isn't’>
2013 Plaster, wood, mixed media Installation view,
Studio Voltaire, London, UK© the artist, Galerie Barbara
Weiss, Berlin; Leo Koenig Inc., New York and Susanne
Vielmetter, Los Angeles Photo: Andy Keate
아이젠만은 과거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 문화의 산물, 가령 만화, 광고, 영화 포스터, 때로는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밈(meme)까지 아우르며 작품에 생기를 더한다. 그의 선 굵은 그림은 그 형태와 수법 면에서 자유 구상(Figuration Libre)을 연상케 한다. 1980년대 프랑스에서 ‘구상회화’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일련의 작가들은 논리와 분석,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그리는 회화적인 행위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유행했던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즉흥적으로 일상의 통속성을 폭로했던 그들의 화법과 아이젠만의 작업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1990년대 직관적인 구상회화로 공고한 스타일을 구축해 온 아이젠만은 점차 조각, 설치 등에 손대며 작품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을 끌어안고 섬세한 감성의 결을 대담하게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힘과 무력함, 예술과 상업성, 성(性)과 소비주의가 영향력을 뻗지 않는 곳이 없는 현대사회의 복합성을 유머와 비판이 섞인 작품으로 꼬집는다.
<The Triumph of Poverty> 2009 Oil on canvas
165.1×208.3cm Collection of Bobbi and Stephen
Rosenthal, New York © the artist and Leo Keonig Inc.
동료 아티스트 A.L. 스타이너(A.L. Steiner)와 함께하는 콜렉티브 Ridykeulous는 보다 공적이면서 직접적인 발언이 두드러지는 활동이다. 개인 작업이 내적인 내레이션이라면 Ridykeulous로서의 작업은 타인을 향한 대화이자 제안에 가깝다. 이러한 공동 작업을 통해 아이젠만은 “예술 창작 행위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일인지에 관해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고 말한다.개인과 그룹, 나아가 사회적 공동체라는 범위의 확장이라는 주제도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기차에 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Weeks on the Train>(2015)을 보자. 화면 중앙에 있는 인물은 비스듬히 앉아 무표정하게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옆자리엔 주인의 얼굴을 닮은 고양이가 실린 캐리어가 놓여 있다. 바로 앞좌석에는 입을 벌린 채 잠든 사람과 음악을 들으며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하늘은 푸르고 노란 꽃들이 만발한 바깥 세계는 기차에 탄 사람들과 무관하게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표정도 색깔도 생김새도 행동도 전혀 다르다. 개인의 심연을 알 길 없이 분리된 세상에서 각자도생하고 있는 현대인의 존재 양식이다.
<Morning Affirmations> 2018 Oil on linen 142.2×111.8cm
Collection of Marilyn and Larry Fields, Chicago, IL
© the artist and Vielmetter Los Angeles Photo: Matt Grubb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Another Green World>(2015)는 또 어떠한가. 창가 너머로 맨해튼이 내다보이는 브루클린의 어느 아파트에서 저녁 파티가 열린 모양이다. 빈자리 없이 들어찬 사람들은 비슷한 듯 다르다.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려는 이들 덕분에 캔버스를 채운 색감은 단조롭지 않다. 그러나 화면 밖 사람들은 그들의 감정이나 내면을 읽어낼 수 없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모여 있지만, 화면 안 사람들조차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다만 어떤 몸짓과 그들을 둘러싼 사물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LP로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나 비틀즈(The Beatles)를 듣는다는 것. 코로나 맥주를 마시고 치즈와 소시지를 안주로 내놓는다는 물질적인 세계의 흔적만이 뚜렷하다. 외부의 표상들이 명징할수록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개인이 표출하고자 했던 의미는 빛을 잃고 흐릿해진다. 아이젠만은 성별, 세대, 인종, 라이프스타일 등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어쩌면 전부 허상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듯 보인다.
<Weeks on the Train> 2015 Oil on canvas
208.3×165.1cm Collection of Rebecca and
Marty Eisenberg, New York,
NY © the artist and Anton Kern Gallery
이처럼 분산된 세계에서 헐겁게 그러모은 표상의 단면을 통해 우리는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화두를 던지고, 의미를 암시하고, 인습적인 구조를 풍자하는 이 페인터가 물성이 두드러지는 조각에 도전했을 때, 미술계는 흥미롭게 그 결과물을 받아들였다. 2012년, 런던의 스튜디오 볼테르(Studio Voltaire) 레지던시 체류 이래로 아이젠만은 조각에 몰두했다. 장르 특유의 촉각적이고 감각적인 면에 심취한 것이다. 평면을 다룰 때에도 추상보다는 구상적인 대상에 집중했던 작가인 만큼 그것에 볼륨을 부여하는 일에 매료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조각은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실물 사이즈의 형체를 갖추고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관람객의 몸과 비슷하거나 더 큰 크기의 덩어리 주변을 돌며 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강렬하게 육체적 감각을 일깨운다. 커다란 손과 발, 성별이나 나이를 구별하기 어려운 희미한 얼굴 등에서 이미 작가의 작업에 친숙한 이들은 기시감을 느꼈다.
<Another Green World> 2015 Oil on canvas
325.1×269.2cm Collection of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 the artist and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
2019년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에서 공개한 <Procession>(2019)은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린 회화처럼 9개의 거대한 개별 조각이 하나의 세트로 구성된 이 작품은 “당혹스럽고 대담하고 희망적이며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 작품은 유대감을 느끼고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걷는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발들이 하나같이 앞을 향해 함께 걷는 모습은 확실히 모종의 희망을 품고 있기는 하다. 청동, 석고, 우레탄 폼, 에폭시, 레진 등 이질적인 재료가 사용된 조각들은 왠지 모를 서글픔과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영리하게 활용된 연기 효과나 참치캔 등 덕분에 재치 있는 터치를 더했다. 역사적 접근과 사회적 접근이라는 미술사의 두 축을 지렛대 삼아 아이젠만은 현재에도 작성되고 있는 페이지 안에 차근차근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문득 이 세계를 생생하게 경험하는 그의 커다란 손은 언제나 무언가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현대사회의 짙은 추상성이 우리를 고단하게 할 때도 어떤 예술은 안간힘을 쓰며 이 세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포착하려 애쓴다.
니콜 아이젠만
Portrait of Nicole Eisenman Photo: Nathan Perkel
작가 니콜 아이젠만은 1965년 프랑스 베르에서 태어났다. 1987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을 졸업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뉴욕 뉴 뮤지엄(New Museum), 쿤스트할레 취리히(Kunsthalle Zürich) 등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 등 국제 미술전에 출품한 바 있다. 2018년, 맥아더 재단(MacArthur Foundation) 펠로우 자격으로 미국 문학예술아카데미에 가입했다. 현재 브루클린에 거주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