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의 작업은 영국 런던 워털루(Waterloo) 기차역의 작은 간이 레스토랑에서 시작된다. 유학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했던 그곳에서 김우진은 낯선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데, 학교에서 ‘마스터’, ‘아티스트’로 불리는 그가 ‘동양인 여성 파트타이머’라는 사뭇 다른 존재로 규정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나라는 존재의 정의는 왜 변화하는가? 이렇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실존과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은 김우진에게 존재에 대한 본연적 가치와 이를 규정하는 시각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그는 발견하게 된다. 투명하지만 함부로 통과할 수 없고 모두가 지나쳐가지만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레스토랑의 유리창처럼, 의도적으로 알아차리기는 힘들지라도 모두의 시선을 관통하는 사회의 숨겨진 프레임과 장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김우진은 유리창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시선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의 가치에 관해 탐구해나가기 시작한다.
<___ in the Wonderland> 2012
싱글채널 비디오 14개의 모니터 설치 1분 24초
<___ in the Wonderland>(2012)는 그 시작점과도 같은 작업이다. 런던 거리 한복판을 걸어가는 뒷모습과 그를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화면 안에 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이들은 형형색색의 화살표와 나이, 이름, 직업이 표시된 글자와 함께 등장한다. 화살표와 글자가 화면에 나타나면 관람객은 시선을 멈추고 이를 읽어내려고 노력하지만, 너무 빠르게 지나가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을뿐더러 사실 그 정보는 거짓된 내용에 불과하다. 그저 외형이나 주어진 정보로만 타인을 파악하려는 관람객의 나이브한 시선을 꼬집기 위해 작가가 마련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이러한 주제의 ‘Within the Frame’ 시리즈는 계속된다. <The Moment>(2012)는 ‘갤러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오’라는 지시어를 관람객에게 부여하고 그 행동을 포착해 ‘예술=그림’이라는 정형화된 사회적 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특별한 기준 없이 무작위로 서칭한 런던의 인물 형상을 반투명 이미지로 제작하고 바닥에 배치한 <One Fine Day>(2013)는 ‘무리’ 안의 사람들이 과연 타인에게 개인으로 인식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이가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낸다. <건널 수 있을까? Ko toku piki? Can I pass?>(2014)는 김우진이 처음 느꼈던 고민의 지점과 조금 더 가깝게 맞닿아있다. 두 화면을 경계가 없는 듯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들. 하지만 실제 화면은 두 개의 프로젝터로 나누어 스크리닝 되고 있고 관람객의 그림자는 양쪽을 넘나들지 못한 채 각각의 화면 안에서만 움직인다. 이는 자신만의 시선에 갇혀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이들을 향한 작가의 의도적인 비판이다.
<Memory of Brave New Exercise: CN2013>
2017 종이 위에 커피와 잉크, 나무프레임 26×32cm
<Memory of Brave New Exercise: JP2012>
2017 종이 위에 커피와 잉크, 나무프레임 26×32cm
한편, 최근 김우진의 작업은 소멸해가는 문화적 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에
관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모아 기억 저변을 형성하는 사회적 프레임을 찾는 데 더욱 집중한다. ‘Brave New
Exercise Project’(2015-)는 한국, 중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의 집단체조 문화에 대한 역사적, 개인적 이야기를
수집하고 질문을 형성하는 시공간을 만들어 관람객 스스로 자기 안에 내재된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식하게 만든다. ‘Memories Project’(2016-)는 이미 사라졌거나, 점차
사라져가는 언어를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추정하고 지역민들의 기억을 통해 그 안에 은밀하게 작동하는
장치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첫 번째 파트 <사라지는
것들, 기억, 길들여지거나 남는 것>은 대만의 공용어가 짧은 시간 안에 만다린어로 바뀌면서 사라져가는 민남어와 객가어를, 두 번째 파트 <무너지는 기호들>은 이와 유사한 홍콩의 상황을 다뤘다. 세 번째 파트 <완벽한 결말의 서막>은 제주어를 소재로 한 작업이다. 한국어를 단일어라 여기며 자란 표준 한국어 사용자이자 관찰자인 작가가 ‘한국어’인 ‘제주 사투리’ 받아쓰기를
거의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녀들의 노동요, 사라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한 모습 등은 우리가 굳건히
믿는 것들에 대해 균열을 가한다.
<한국어 받아쓰기 시험_ 다음을 듣고 따라 쓰시오>
2019 4채널 HD 비디오 5분 26초 사진: 조준용
그런 그에게 최근 화두를 묻자 ‘사라져가는 직업’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완벽한 결말의 서막>을 위해 해녀의 노동요를 수집하던 중 해녀란 직업이 사라지는 현상을 포착한 그는 점차 없어질 밥벌이 혹은 노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온전히 상황을 통제하거나 자신의 계획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닌, 커다란 골자를 잡아놓은 뒤 과정 속 발견되는 사실을 포착해 작업을 진행하는 김우진은 마치 흘러가는 파도에 몸을 맡기며 여유롭게 물고기를 낚아채는 어부와 같다. 그리고 김우진은 애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서 ‘애쓰다’는 ‘마음과 힘을 다해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다’는 뜻으로 정의된다. 애써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그러기에 그 누구도 애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지만, 애쓰지 않으면 결국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있다. 말하려 애쓰지 않으면 말해지지 않게 되고, 기억하려 애쓰지 않으면 결국 잊혀지고야 마는 것들. 김우진은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을 애써 발견하고,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써 모아, 바라보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향해 애써 묻는다. 감춰진 시선의 틈에서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고.
김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