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전시였던 지난 2012년 PKM 갤러리 개인전 <원예학자의 꿈-새로운 종들>에서 바스는 아예 장 드뷔페(Jean Dubuffet)의 스타일에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과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추상표현주의를 섞었다. “거장 미술가들의 스타일과 기법을 섞어보면서 그들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고 나만의 스타일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믹스&매치. DJ가 기존 음원의 일부를 따다 섞어 붙여 새로운 곡을 만드는 것을 연상시키는 작업 방식 자체보다 더욱 흥미로운 건, 헤르난 바스가 직접 언급하는 선대 거장들의 이름이 방해되기는커녕 오히려 감상의 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가 말하는 ‘나만의 스타일’이 워낙 뚜렷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 바스의 작품이 그가 참조한 거장들의 시대엔 결코 그려지지 않았을 그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Period jetsam> 2016 Acrylic on paper 30×22inches
(paper) 41.75×34 ×1.5inches (framed)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Photo: Max Yawney
최근작 <Four bathers by a river>는 앞서 언급한 마티스의 작품에서 네 명 인물의 구도와 자세를 대놓고 차용한 작품이다. 배경에 무성하게 자란 양치식물의 존재 역시 그대로지만, 한눈에 다른 건 인물의 성별. 헤르난 바스의 그림에는 벌거벗은 여인 대신 유년기를 막 벗어난 듯한, 하나 같이 납작한 가슴을 지닌 소년이 등장한다. 무거운 근육과 지방층에서 모두 자유로운 낭창한 소년들이 온갖 화려한 색채의 꽃, 식물로 가득하지만 어딘가 음울한 몽환적 공간 속에 자리한다. 소년들은 좀처럼 관람객과 눈을 맞추지 않지만 그림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선 위태로울 정도로 노골적인 성적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헤르난 바스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레퍼런스를 명확히 밝히지만, 시대와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이고 모호한 배경에 장미와 양치식물, 핑크 플라밍고, 발밑을 흐르는 검은 물 등 클리셰라 할 만큼 성적, 낭만적 함의가 뚜렷한 상징을 겹친다. 모호함과 클리셰 사이에서 기묘한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의 소년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을 두고 이탈리아 패션지 『누메로 우노』는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의 깡마른 패션쇼 모델’을 떠올렸고, 미술사학자 미셸 C. 콘(Michele C. Cone)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소설 속 캐릭터 ‘롤리타’의 남성형 ‘롤리토(lolito)’라는 별칭을 붙였다. “오스카 와일드가 21세기에 시각 예술가였다면 바스의 그림 같은 작업을 했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가 발간하는 『노이에 저널(Neue Journal)』의 것. 『가디언(The Guardian)』의 미술 기자 스카이 셔윈(Skye Sherwin)은 전시 리뷰에서 그의 회화가 ‘첫 키스처럼 날카롭다(intense as a first kiss)’고 썼다.
<Champagne Corks Bobbed in the Pool That Morning>
2016 Acrylic on linen 60×48×1.375inches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Photo: Daniel Portnoy
그림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당시, 미국 현대미술의 주류이던 팝아트나 미니멀리즘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에 끌렸다는 그는 지금도 MoMA보다는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에서 보내는 하루를 더 선호한다고. 워낙 그가 그리고 싶어 했던 그림도 ‘고전적 거장’다운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09년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과 나눈 농담 섞인 대화가 무척 흥미롭다. “사실 내 그림은 실패에 기반을 둡니다. 나는 항상 실패하죠. 축복과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매번 고전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하지만, 그 결과는 늘 인상파의 작품 쪽에 더 가까워져요. 참을성이 없다고 해도 좋고, 재능 부족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인상파는 우리가 모두 좋아할 정도까지만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 초반 마이애미 출신의 호텔 기업가이자 세계적 미술품 컬렉터인 돈&메라 루벨(Donald & Mera Rubell) 부부의 눈에 띄며 헤르난 바스의 기묘한 소년들은 빠른 속도로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2005년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Victoria Miro)에서 연 개인전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바스는 가장 촉망받는 젊은 회화 작가로서 전 세계 갤러리는 물론 브루클린 미술관(Brooklyn Museum)(2009), 하노버 예술협회(Kunstverein Hannover)(2012) 등 주요 미술관에서 대대적인 개인전을 가진다. 2012년에는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례적으로 빠른 성취를 거둔 그는 최근의 갑작스러운 예술 애호 붐으로 떠들썩한 고향 마이애미를 벗어나 미시간 주의 쇠락한 산업 도시 디트로이트로 거주지를 옮겨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Four bathers by a river> 2017
Acrylic on linen 213.4×182.9cm
Courtesy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and PKM Gallery, Seoul
헤르난 바스는 10대 후반부터 소년을 그렸다. 내성적이던 그는 뽐내기 좋아하는 게이의 전형에 들어맞지 않았고, 스트레이트 남성 쪽은 더더욱 아니었다.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그는 리넨 천에 아크릴 물감으로 자신을 닮은 수줍고 깡마른 소년을 그렸다. 바스는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년들을 ‘동성애자 연옥(fag limbo)에 갇힌 상태’라고 표현했다. 어린아이도 성인도 아닌, 연약하고 창백한 소년들. ‘계집애 같다’고 놀림 받지만 대부분의 이성애자 남성 역시 잠시 거쳐 가는 단계. 그의 초기 작품 속에서 홀로 축음기를 듣거나, 빅토리아풍 러플 셔츠와 타이츠 차림으로 나른하게 누워 있던 소년들은 점차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 화려해진 배경 속에서 뜻 모를 눈빛을 주고받으며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존재만은 분명한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바스는 그걸 ‘성장’이라 표현한다.
캘빈 클라인 모델 같아 보이기만 했던 소년들이 디킨슨(Charles Dickens)과 소로(Henry David Thoreau)를 읽은 것이라고. 자신이 성장하듯 그들도 함께 성장한 것이라고.
<Case study (Baxter, deep sea enthusiast)> 2014
Acrylic and crushed seashell on linen
50×40inches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Photo by Daniel Portnoy
‘가장 이상적 자신의 모습’을 묻는 인터뷰이의 질문에 “스무 살 시절의 (마른)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작가의 확고한 취향 때문이리라. 하지만 성적 긴장감이 노골적으로 감도는 몽환적 배경 속에서 관람객과 좀처럼 눈을 마주하지 않는 연약한 소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그 탁월한 아름다움으로 상찬만 하기엔 아무래도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다. 아무리 아름답고 매혹적이라 해도, 2017년의 시공에서 쓰인 ‘롤리타’의 존재 가치는 희박할 것이다. 롤리타와 그 남성형 롤리토. 성별의 전환으로 우리는 헤르난 바스가 그리는 창백한 소년의 위태로운 성적 매력을 별다른 죄책감 없이 감상할 수 있다.
그림 밖 육체를 가진 우리에겐 결코 길게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에 화려한 색채를 지닌 그의 그림은 어딘가 음울하고,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동성애자에게든, 이성애자에게든. 다시 최근 전시로 돌아가 보자. 바스가 노골적으로 마티스의 <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을 차용한 <Four bathers by a river>에서 빠진 것이 있다면 마티스의 작품 하단, 머리를 바짝 세운 흰 뱀의 강렬한 존재감이다. 강가에 위치한 목욕탕 밖에서 세 명의 소년이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하고, 안에 앉아 있는 소년이 깜짝 놀란 듯 뒤돌아보는 그림 한쪽에 뱀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헤르난 바스
Hernan Bas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쿠바계 혈통으로 1978년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난 헤르난 바스는 네 살 때부터 그림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아트 바젤 마이애미가 열리기 한참 전에 성장기를 보낸 바스는 동시대 미술보다는 수세기 전 유럽 거장들의 작품에 매혹되었다. 1996년 고향 도시의 뉴 월드 스쿨 오브 아트를 졸업한 후 뉴욕 쿠퍼 유니온 미술 대학에 입학했지만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곧 그만두었다. ‘고전적 거장’다운 그림을 추구하는 그의 이름은 현대미술의 명확한 브랜드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