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전시 <반경 0km>는 첫 개인전답지 않게 완성된 그림과 주제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눈에 띄는 전시였다.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싸늘한 시선, 그리고 거기에 대한 무심한 말 걸기의 방식이 돋보이는 그림 속엔 현실과 허구가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작가의 상상 혹은 공상과 뒤섞이거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온 사람들이 짜깁기 돼 있었다. 그러고 나서 2019년 개인전 <색, 뒤>엔 새로운 작품들이 내걸렸다. 비현실적 장면 같으면서도 기시감 높은 일상이 종종 발견되는, 전작과 익숙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박경진의 작품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보다 사적인 이야기에 국한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층위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의 조짐을 드러냈다.
<파란 문> 2018 캔버스에 유채 91×72.5cm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화면 속에서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인데, 이전에 그가 작업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뉴스 이미지에 작가의 상상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공간을 다루었다면, 달라진 작업에서는 ‘세트장’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을 드러냈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은 줌 아웃 되듯 뒤로 확 물러서고 그 자리에 공간의 구조와 이야기를 통해서 화면 안의 에피소드를 일관되게 아우르는 것이다. 실재 전경을 찍은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그 안에 덧붙여진 무수히 다른 공간과 이야기의 레이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산만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일상에서 포착한 하나의 순간처럼 자연스럽고 견고한 세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냈다.
<주황 바닥> 2018 캔버스에 유채 227.3×181.8cm
박경진은 세트를 짓는다. 작업을 위해서가 아닌 일로서 그는 가상의 공간을 그리고 세운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그 공간이 가진, 여러 방식으로 변형 가능한 가변성의 성질을 회화작업에 적용한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수시로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세트들과 달리 작가의 현재를 대변하는 존재들이지만 실재 현장이나 그림 속 모두에서 그들은 개인의 성질에서 벗어나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추상적 인물들로 드러난다. 허나 작가가 주지시키듯, 세트장에서 물질을 재현하는 행위와 작업실에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한참 다르다. 목공 팀이 목재로 문을 만들어 놓으면, 박경진은 미술팀이 건네준 자그마한 사진을 참고하며 페인트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철문으로 성질을 바꾸고 표면을 재현한다.
<점심시간> 2018 캔버스에 유채 227.3×181.8cm
철의 질감과 색감 그리고 녹을 나타낸다. 이 지점에서 그림과 다른 점은 문의 형태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목공 팀의 몫이다. 그는 다만 대상의 성질과 껍데기 그리고 시간의 때를 재현하는 세트장 제작에 대해 “형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낀다”고 피력한다. 그곳에서 느낀 해방감 혹은 언캐니한 감상을 작업실로 돌아와 캔버스 안에 색과 붓질로 펼친다. 세트장에서 그린 철문과 작업실에서 그린 철문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 다름을 확인하고 부각시키는 행위들이 박경진의 회화에 반영되는데, 그에게 그림 그리기란 그 차이들이 어떤 미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연구인 셈이다. 두 공간에서 재현이라는 행위가 지닌 서로 다른 지점이야말로 그에게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이며 회화 자체에 몰두하게 만든다.
<마약사무실파현장(설치 모습)> 2018
캔버스에 유채 227.3×545.4cm
박경진 화면 속 하나의 모티브는 어느새 관람객을 그림 속 공간으로 이끄는데, 그 사이 작가는 대상의 재현을 지양하며 재구축된 시안과 더불어 물감의 층위변화와 뭉개짐, 지움, 삭제, 붓질로 한 번 더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회화적 조형미의 가능성을 찾는다. 일상 속에서, 상상 속에서, 때로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도려낸 이미지들을 붓을 통해 새로운 화면으로 완성하는 작가는 지금껏 인물과는 거리감 있는 화면을 구성해왔지만 향후 일을 하며 페인트가 튄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그릴 계획을 갖고 있다. 그림을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이야기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완성하는 그의 또 다른 특유가 기다려진다.
박경진
작가 박경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수학했다. 그리기라는 행위가 연결된, 생업과 작업사이에 놓여 있는 실존의 모습을 회화작업으로 표현하는 그는 생업의 현장인 세트장의 풍경을 형상과 배경, 노동과 유희, 일과 작품 사이로 접근하여 풀어내고 있다. 2014년 OCI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인사미술공간 <현장>(2018), 갤러리조선 <색, 뒤>(2019)를 통해 회화의 물성, 회화성에 대한 연구와 함께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꾀한 작품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북서울미술관 등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 관두미술관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2016년 ‘38회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다. 오는 10월 아트스페이스H, 12월 인디프레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