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주변 환경이 피상적인 의미의 풍경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시선의 교차로 만들어짐을 느끼면서, 그렇다면 자신이 예술가로서 가질 수 있는 시선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된 것이다. 고민의 결과로 다양한 분야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틈새에 존재하면서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시각화하는 것이 예술가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라는 답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작가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자신과 가장 밀접하게 있는 것에 관심을 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각적인 면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회화를 전공했고, 손으로 그리고 만들어내는 장인으로서의 예술가적인 면모도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 작품을 계획할 때도 일단은 시각적으로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고, 그 안에 좀 더 궁금증을 유발하는 요소를 집어넣는다. 가령 알록달록한 지붕을 그렸는데 알고 보면 그것이 온갖 유해 물질을 내뿜는 공장의 지붕으로, 주변 마을을 파괴한다는 스토리가 숨어있는 식이다. 조형적으로 빚어내는 미적 효과도 분명 있지만, 그 이면에 실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처럼 사회적 역할과 결부시켜 고민하고 만들어낸 작업은 작가 스스로 일차적 비평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계획된 진부화-어떤 망루 그리고 폐허>
2013 혼합재료 가변크기
이것은 작업 자체에 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현상에 대한 비평이라고 해야 보다 적확할 것이다. 실제로 김지은은 평소에도 사회과학서적을 즐겨 읽는다. 공상에 빠지거나 상상을 즐기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의문을 던지는 성향은 작업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러다 보니 작가가 거주하게 되는 동네와 근방을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상황을 포착하는데, 그러한 풍경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연유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가진다. 관찰한 내용은 장시간의 리서치를 거쳐 직관적인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 드러난 모습을 보면서 그 바깥을 만들어내는 구조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다. 2010년에 치른 개인전의 제목이자 동명의 작품제목이기도 한 <계획된 진부화>는 곧 폐기될 주택에 관한 작업으로 미국의 근교 도시에서 흔히 보는 주택형태를 콜라주로 표현했다.
본래 경제용어로 새로운 상품의 구매를 촉진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사람들이 오래된 품종을 진부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기업행동을 뜻하는 ‘계획적 진부화’는 김지은의 작품에서 주택구조의 뼈대로 치환된다. 미국에서 거주할 당시 경험했던 풍경을 풀어냈는데, 덤스터(Dumpster), 타이백(Tyvek), 각목 등 건설 현장에서나 볼 법한 재료와 오브제를 전시장으로 끌어들였다. 다만 인부들의 고함, 철근이 부딪치고, 육중한 장비가 콘크리트를 뚫으며 나는 굉음 같은 소리들은 이 풍경에서 빠져있다. 소거된 소음과 말끔한 색면은 낯익은 도시 건설 현장을 잘 디자인된 세트장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세트장 역시 언젠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점에서 전체적인 전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택지개발자의 집> 2010
사실 김지은은 ‘페인터(Painter)’로서 강한 정체성을 지녔고 여전히 자신의 출발점이 회화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다 해외에 체류하게 되면서 온전히 회화만을 고집할 수 없는 환경에 처했고, 그때부터 재료나 장르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하게 됐다. 시트지를 활용한 콜라주 작업과 다양한 설치 작업에 도전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회화를 완전히 등진 것은 아니다. 재현적인 작업을 지속하고 있고, 그 안에서 회화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치 역시 확장된 차원에서의 회화라고 여긴다. 한번 틀을 깬 작가는 <비계덩어리>(2012)와 <어떤 망루>(2014)처럼 대규모 설치 작업에도 거침없게 되었다. 건축 공사 때 높은 곳에서 일하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가설물인 비계(飛階)는 어묵꼬치 나무와 빵을 포장하는 끈을 사용해 세웠다. 유압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일일이 붙인 무늬목 시트지로 재현한 <어떤 망루>는 높이만 대략 12m에 달한다. 캔버스 화면을 벗어난 작가의 몸짓은 위로 옆으로 한없이 팽창한다.
<무지개떡 프로젝트4> 2004
캔버스에 유채 72.8×60.6cm
이런 그가 요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콘크리트.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선 도시에선 무엇보다 낯익은 재료지만, 누구도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콘크리트다. 작가는 이 안에도 나름의 정치학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획된 진부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축물도 결국은 사라지고 말 임시건축이라고 상정한다. 많은 이들이 당연한 듯 살고 있지만, 사람이 없어지는 것처럼 건축물도 사라질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투기 광풍, 무분별한 개발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작가는 작업으로써 이런 현상들에 대한 나름의 발언을 하고, 그 발언의 무게와 책임감은 속해있는 사회와의 접점으로 작동한다. 김지은에게는 기본적인 발상부터 재료의 활용, 리서치 방식, 표현된 결과물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자세가 하나 있다.
<폐타이어와 소성로(Waste Tire and Kiln)>
(Diptych) 2016 캔버스에 유채 227.3×181.8cm each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만끽한다는 점이다. 그는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낭비’라고 단언한다. 그렇기에 발 디디고 사는 곳에서 주제를 찾은 후 공부하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자신의 손에 붓이나 가위를 들고 일단 실행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관해 그 누구보다 명쾌하게 설명한다. “사회학자나 인류학자와 같은 태도로 과거와 미래가 얽혀있는 현재의 이슈를 다루는 본인의 작업은 항상 거기에 있어서 눈여겨보거나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상의 (비)기념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여정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김지은
작가 김지은은 1977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와 스코히건 회화 조각 학교에서 수학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송은아트스페이스 등 여러 기획전에 참여했고, 인사미술공간, 브레인팩토리, 대안공간 루프, 두산갤러리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2013년에는 다양한 아트레지던시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저서 『소라게살이』를 펴내기도 했다. 김지은은 지난달 30일부터 10월 28일까지 갤러리시몬에서 <변덕스러운 땅>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으로 다수의 신작을 선보인다.